저는 미국에 살고 있으며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한번 한국에 나가려면 비행기 값만으로도 여간 큰 돈이 들기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는 일은 4-5년에 한번이 고작입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해야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수기에 비행기표를 구입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비행기표 가격만 약 6백만원에 3-4주간의 용돈들을 포함하면 사실 4-5년만의 방문 조차도 여의치는 않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한국을 가야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한번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연로하신 두분의 부모님과 두분의 장인/장모님이 생존해 있는 장남이자 사위로서 새벽쯤에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나 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저희 집의 전화하나를 한국의 070 전화를 받는 전용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는 전화는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큰 애가 대학에 가고 나서는 일체의 가족여행을 가거나 휴가를 쓰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12월 연말에는 일년간 쓰지 않은 휴가가 쌓이게 되어 안 쓴다고 돈으로 계산해 주는 것도 아닌지라 언제나 12월 연말에는 거의 한달을 놀게 됩니다. 절친한 직장 동료들도 이런 저를 잘 알기에 아예 여름쯤이면 흔히 하는 대화인 올해 휴가 어디로 갈래 대신에 '넌 올해도 12월 한달을 놀겠구나' 라고 아예 대놓고 얘기하곤 합니다. ^^
그런 휴가를 앞둔 작년 12월초 아주 늦은 저녁시간에 말씀드린 그 전화기가 울립니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에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그것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직계 가족도 아닌 고모님께서 'XX 야, 니가 지금 한국에 나와봐야겠다' 라고 딱 한문장 하시고 다시 울음을 터트리시는 것을 들으니 왠만한 스릴러 영화는 저리 가라 할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흐릅니다.
경직된 나의 표정을 본 아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저 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가야될 것 같아"
다행히도 부모님에게 큰 일이 당장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급히 나가 봐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생략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도 마일리지 티켓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몇십년간 단 한번도 쓰지 않은 마일리지가 조금 있었거든요 (몇십년이라도 실 방문수는 별로 안됩니다). 다행히 한장의 마일리지 티켓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제가 끝내고 가야할 일이 있어서 3-4일 후 휴가가 시작되는 날로 맞추어서 마일리지를 끊었습니다. 이코노미에는 마일리지 자리가 없어서 평생 타본 적이 없는 비지니스를 끊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비지니스를 처음 타고 싶지는 않았는데라는 불경한 생각이 그 순간에도 잠시 스쳐갑니다.
어차피 직장에 가서 얘기를 해도 휴가가 시작하는 날짜에 귀국을 결정했으니 업무에는 차질이 없습니다만 한분도 아니고 2-3명의 상사들이 왜 당장 떠나지 않느냐고 이해를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급하게 왔습니다. 보통 한국에 나올 때면 2-3달 전부터 차곡차곡 계획을 짜고 만날 분들을 정리하고 그 분들께 일일이 전화해서 편한 시간을 잡아서 스케쥴을 꼼꼼히 짜고 옵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가가 전주인데 한국에 있는 동안 70% 정도는 서울에서 거주하고 30% 정도만 전주의 부모님 댁에 머무는데 그 이유는 제가 만나야 하는 분, 지인들, 친구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고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에 고향에 오래 대부분 머물 작정을 하고 왔습니다. 2주 반 정도의 일정을 잡았는데 사실상 3주가 넘는 휴가가 있었음에도 그래도 내 가족 내 자식들에게도 연말의 작은 시간을 할애해 주고 싶은 이기적인 생각에서였습니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라 그러나 봅니다.
언제나 한국에 도착하게 되면 일단 서울의 처가댁에 들렸다가 숨 좀 돌리고 내려가는게 한번도 변하지 않은 저의 귀국 일정인데 바로 인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합니다. 참 편리하게 되어 있더군요. 공항에서 전국 주요도시로 아주 쾌적한 버스편으로 바로 갈 수 있으니.. 4년만에 보는 창밖의 풍경은 변한게 별로 없었을 터인데도 이상하게도 이국적입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서인가요? 직장생활하면서 예전에 고생했던 경기도 화성 근처를 지나는데 상전벽해라고 할만큼 많이 변했더군요. 화성, 발안, 향남 이런데는 참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미친듯이 챙겨서 혼자서 홀홀단신 귀국했던 것과는 달리 상황은 많이 호전되어서 부모님 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오전에서 오후 6시까지는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현직에 종사하고 계셔서 가업의 현장에 나가서 같이 앉아있는게 고작이었지만 말입니다. 아침 일찍 아버지가 나가서 문을 열고 어머니랑 제가 오전 9시 넘어서 나가서 교대하면 아버지가 볼 일을 보시고 다시 오후에 돌아오시면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돌아오고 제가 집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드시고) 나중에 아버지가 문을 닫고 들어오시는 그런 패턴입니다.
그런데 저의 한국 방문을 알게 된 초등학교 친구들의 성화가 장난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곳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네이버 밴드를 통하여 다시 만났고 한국에 갈 수 없는 저를 위하여 친구들이 저희 부모님이 일하시는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사진을 찍어서 저에게 보내준 나름 저에게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혹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 동창들 때문에 눈물 좀 흘렸습니다 라는 글이었습니다)
37년이상 심지어는 40년 동안을 한번도 다시 본 적이 없는 친구가 미쿡(오타 아닙니다. 걔네들이 이렇게 부릅니다 ^^)에서 왔다고 만나자고 성화입니다. 어차피 저녁 7시 이후쯤에는 어머님도 잠자리에 드시니 친구들 좀 만나도 되겠다는 자기 합리화도 좀 했습니다. 그렇게 모임이 만들어지고 저는 근 40여년만에 사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초등학교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가게 됩니다 (그래도 서울에 사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은 여러 계기로 소개한 적이 있지만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은 처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멋진 옷 같은 것은 저에게도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이곳 미국 생활은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서 좋습니다) 급하게 온 한국에 들고 온 옷가지도 변변찮아 아무거나 주워입고 마침 우리 아파트 근처에 살아 가끔 저희 부모님을 챙겨주고 제가 이곳 프차에 올린 학위를 따기 위한 수기 글을 인쇄까지 해서 부모님께 전해주었던 친구를 38년만에 만나 그의 차를 얻어타고 또 다른 동창이 운영하는 족발집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이 친구는 제가 얼굴을 잘 기억하는 친구입니다. ^^
그 모임을 좀 일찍 나가서 자리에 앉고 속속들이 친구들이 도착하는 순간 알았습니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내 동창들, 특히 여자동창들은 정말 너무나 멋지게 차려입고 왔더군요. 저를 빼고 총 20명이 참석을 했고 그 중 11명은 여자동창이었습니다. 여자동창 친구들은 다들 정말 젊어 보였고 참 세련된 옷차림이어서 저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입담이 예전부터 걸죽했던 친구가 크게 한마디 합니다 (친구의 말을 그대로 전하느라 아래의 글에 비속어가 들어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년들이 애인 만나러 왔냐????"
거친 말투에 깜짝 놀랐지만 바로 옆에 앉은 여자동창이 원래 우리 자주 만나서 이러고 지낸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아마도 그 친구가 보기에도 제가 굉장히 놀라는게 느껴졌나 봅니다. ^^
다행히 만나고 보니 그 오랜 격차에도 불구하고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르더군요. 제 세대는 여학생들과 친하게 지낸 세대가 아닌데다가 제가 당시에 임원 같은 것을 해서 여자급우랑 이야기만 나누어도 화장실에 "XX 이는 누구랑 연애한대요" 낙서가 올라오던 시대였고 그로 인해 학교 안다닌다고 울고불고 했던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었던지라 애써 여학생들을 외면하고 살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친구들 얼굴과 기억들이 떠오르더라구요. 무려 40년전에 만났던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죠.
당시 저는 부모님이 전문직에 계셔서 비교적 유복하게 사는 편이었는데 이 날 참석한 친구 중의 하나는 우리 집에서 케익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먹어보았다 그래서 그 때 그 친구가 궁금해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에서 왔다라고 해서 저를 놀라게 하였고 조금 늦게 도착한 친구는 평택에서 전주까지 3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버스를 타고 달려와 주어서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집에서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정작 저는 기억이 아주 상세하게 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참 많은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많은 일을 함께 했더군요. ^^ 동창친구들이 들려주는 저의어릴 적 모습은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저에게는 낯설게까지 느껴지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들은 끊임이 없었고 이날 모임이 열린 동창 친구가 하는 족발/갈비집의 양념족발은 평생 처음 먹어보는 기막힌 맛이더군요. 나중에 제가 집에 혼자 있게 된 날 어머니도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저녁을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카톡으로 마침 연락이 되어서 저에게 족발을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배달을 하지 않는 식당인데 어찌 보내냐 했더니 한국은 음식도 오토바이 택배로 배달이 되더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도 이 족발 맛이 생각나서 침이 고이고 있습니다. 잘게 썰은 뼈가 붙은 아주 매콤하고 칼칼한 족발은 정말 최곱니다. 쓰읍… ) 단언컨대 식문화에 관한한 한국은 세계 최고입니다. ^^
"너네들 집에 안가도 되냐?"
대부분 가정이 있는 친구 그것도 여자동창들의 경우 모임이 평일 그것도 새벽 3시를 넘어감에도 함께 해주는 것에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더니 다들 얘기하고 나왔으니 걱정말라고 하는데서도 또 한번의 문화컬쳐를 느꼈습니다 ^^ 그렇게 새벽 3시 반을 넘어서 첫 만남이 끝났고 저는 정말 아주 아주 오랜만에 제가 모임의 주인공이 된 그런 황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지인들을 만나뵈어도 처음 10분 정도의 안부 이후에는 모인 분들 각자의 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렇게 만나서 헤어질때까지 제 이야기만 하는 모임은 아마 없지 않았나 싶을만큼 친구들은 저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미국에서의 생활 이야기 또 각자의 이야기들로 정말 저만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인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렇게 단 한번의 멋진 만남으로 기억되고 끝날줄 알았더니만 저의 고향 친구들은 참으로 지독하게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더군요. 총 7번의 모임을 했습니다. '니네들 징하다' 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
저 하나 보자고 나와준 친구들이 궁금해서 일일이 기록해둔 이름들을 세어보니 총 72명의 초등학교 동창이 참석해 주었더군요 (물론 중복 인원 덕분에 숫자가 많아졌습니다만 ^^). 그 중에 서울에서 열린 한번의 모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모임을 개근해 준 친구도 있었고 새벽 3시에 공항가는 버스를 타야하는 마지막 날 밤 7시에 저를 불러내어 마지막으로 못 먹어본 것 다 사주겠다고 하여 그동안 전주에서 놓치고 갈뻔했던 소머리 국밥과 양념통닭을 사주면서 저를 10시까지 붙잡았던 4명의 여자동창 친구들은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50이 되었음에도 변변하게 돈을 벌지 못하는 아들에게 너를 보러오는 친구들 대접은 니가 다해라고 쾌히 아버지가 신용카드를 쾌척해 주셨음에도 제 친구들은 티안나게 몰래 몰래 계산을 했더라구요. 어쩐지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갈비와 족발과 술을 양껏 먹었음에도 20만원쯤 나와서 한국이 생각보다 참 싸구나 생각했던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었습니다. ^^
그런데 정작 저를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야기는 이제야 등장합니다. ^^ 고향을 떠나기전 마지막 공식 송별모임에서 한 여자동창이 명함식으로 된 USB 메모리를 하나 슬쩍 건네줍니다.
"미국 가면 봐"
USB 메모리? 아 사진을 담아 주었나보구나. 이제 80이 되어가는 아버지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그 새벽 3시에 도착한 버스 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로 도착한 공항의 라운지에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USB 메모리를 노트북에 꼽아 봅니다.
"안녕 XX 야~~~"
메모리 속에는 뜻밖에도 동영상이 담겨 있었고 동영상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 곡만큼은 피아노로 직접 연주해 보고 싶다고 꿈을 꾸었었고 50이 다된 나이에 그 꿈을 이루었다고 한번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던 '문리버 (Moon river)’ 음악이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자식들 센스 하나는 정말… ^^;;
그 동영상 속에서 동창 친구들은 하나씩 돌아가면서 저에게 메시지를 남겨주고 있었습니다. 장소를 보아하니 모두 모임이 있던 곳입니다. 한번도 아닌 여러번에 걸쳐 찍은 것들입니다. 아마도 제가 화장실에 갈때나 다른 친구들하고 핸드폰으로 연락이 되서 통화하고 있을 때 찍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USB 메모리를 건네 준 여자동창 친구가 열심히 편집을 해서 음악을 넣고 자막까지 넣어서 동영상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50이 다된 아주머니가 컴퓨터를 들여다 보면서 한땀 한땀 편집했을 장면을 생각하니 울컥합니다 (선아야, 고마워~~),
이 세상의 몇명이나 40여년을 못 본 많은 어릴적 친구들의 격려의 말이 담긴 동영상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더더욱 감동이었습니다. 지금도 조금만 힘든 모습으로 축쳐져서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놀리듯이 친구들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얘기합니다.
"안녕 XX 야~~~ 나 누구야 깔깔깔"
그리고 항상 정색을 하며 얘기를 더합니다.
"자기 힘을 내… 자기에게는 이렇게 자기를 응원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
분명히 아내에게 놀림을 받는 건데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도 이 친구들의 동영상은 제 핸드폰에서 제가 조금 쳐질 때마다 보는 단골 동영상이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동영상을 넋놓고 보고 있다가 지나가는 자녀들에게 아빠 동창 친구들이 아빠를 초등학교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자랑을 해도 '풋' 하는 표정으로 관심도 없이 지나가버리는게 좀 깨는 일이긴 합니다만.. 하긴 발톱이나 뜯고 응접실 소파에서 코를 골고 널부러져 있는 아빠가 저런 아이돌 어쩌고 하니 기가 막힐 것 같긴 합니다만… 이 놈들아 니네 애비가 한때는 엄청 잘 나갔다고!! 흥!!!
결국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화들짝 마음을 졸이고 달려온 한국에서 정말 오래 간직할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저에게 언제나 힐링이 되어줄 평생의 선물을 하나 받고 온 저는 참 행운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몇자 적자고 했던 것이 이렇게 길어져 버렸고 짧은 방문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건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던 공부와 직장생활로 언제나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 나름 한 찌질하는 소시민인 저에게도 이런 멋진 일이 생기기도 하네요.
마음 같아서는 동영상을 공개해서 자랑도 하고 싶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여자동창 친구들의 소중한 초상권 보호를 위해 그리 하지 못함을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