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제가 미국에서 은퇴연금에 투자하는 방법" 에서 미국의 은퇴연금 401K 와 제가 투자하는 방법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설명을 드렸는데요 (401K 가 뭔가 하시는 분은 지난 글을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번에는 저의 개인적인 기록으로 남길겸 실제 저의 투자수익을 한번 공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조금 공격적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는데요 주로 자사 주식과 Large Equity Fund (미국에서 대형회사들의 주식으로 구성된 펀드) 그리고 Index Fund (관리가 필요없어 수수료가 낮은 주가에 따라 움직이는 펀드.  사실상 모든 주식을 때려넣고 일정 분량씩 나누어 가지는 펀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회사에서 투자에 관한 북클럽을 하고 있고 Benjamin Graham 의 고전 'The Intelligent Investor" 에 따르면 이렇게 주식 관련된 펀드로만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투자(Investment) 가 아닌 투기(Speculation)이라는 경고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물들어올때 노 젓는다고 Dow Jones 지수 (DJIA) 가 높은 주식시장이 활황인 Bull Market 에서는 이렇게 단기간이지만 공격적으로 구성해서 이득을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401K 포트폴리오는 언제나 재구성이 가능하니까요)


먼저 제 2017년 1월 1일부터 8월말까지의 총 수익률(ROI) 를 보겠습니다.




투자 북클럽을 리드하는 분의 말씀으로는 10년 평균으로 7% 정도의 수익률을 얻으면 대단히 훌륭한 투자이고 연 10% 이상의 수익률이라면 좋다고 하는데 20.22% 의 수익률이라니 제법 공격적인 투자가 먹혀 들어간 셈입니다.  그럼 지난 12개월 즉 2016년 9월부터 2017년 8월말까지의 수익률도 한번 보겠습니다.



놀랍게도 더욱 좋습니다.  28.68% 라니 마음에 듭니다. ^^  다만 이 상황이 지속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는 전적으로 주식시장의 활황 덕분입니다.  애초에 Target Fund 라고 은퇴시기에 맞춰 펀드매니져들이 구성하고 다소 수수료가 높은 펀드를 벗어나 내 나름대로 공격적으로 구성한 탓입니다만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서 증시에 따라서 조정을 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같은 시기의 타켓펀드의 수익률은 은퇴연도에 따라 따르지만 10~12% 정도이니 심플하게 인덱스 펀드와 자사 주식으로 구성한 포트폴리오가 두배 혹은 시기에 따라서 3배 정도 압도를 하네요.


더구나 지속적으로 우상향 하는 그래프가 마음에 듭니다만 펀드라는 것 자체가 실제적으로 제 주머니에 돈이 들어온게 아니라 펀드의 가치가 하락하면 언제든 손실이 될 수 있으므로 하락세가 보이거든 저 펀드를 다 팔아서 수익률 변동이 별로 없는 Bond (채권) 등으로 바꿀 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뭐 이미 비트코인등의 가상화폐 혹은 암호화폐 투자를 통하여 3000% 에 달하는 황당한 수익률을 기록해 보았지만 그래도 그것보다는 다소 안정적인 제 은퇴연금에서 나름 좋은 수익을 거두니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수익률을 보며 저 때는 참 좋았는데 하고 씁쓸하게 생각할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


개인적인 기록을 위하여 남겨보았습니다.  이 수익률 보시고 좌절하시는 분들 없기를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소 뒷걸음 치다 쥐 잡은거니까요.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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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국의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이고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보는 일이 거의 다인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래서 어디 출장을 간다거나 일하는 건물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어쩌다 그런 기회가 있어 모처럼 바깥 바람을 쓸 기회가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무척 감사하게 수락하는 편입니다.  이 모처럼의 외유에서 일어난 작은 일화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어 정말 오랜만에 몇자 두드려 봅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근무하는 특성상 각 지역에서 온 사원들을 위하여 자신의 출신 지역의 특성을 살린 활동과 유대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한국인의 경우 Korean Resource Group 이라고하여 회사에 근무하는 한국인은 물론 다른 국적의 회사 중역 및 관심있는 외국인 사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활발하게 프로젝트등을 개발해서 유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제가 대외홍보쪽 일을 맡아보게 되어 외부의 행사에 회사의 지명도를 넓히기 위하여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이번에 미주에서 열리는 미국 거주 한인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제법 규모가 큰 컨퍼런스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천여명이 넘게 참석하는 이 행사에 제가 느끼기에 반은 한국에서 온 학자들 및 기업인사들 그리고 나머지 반은 미국에 거주하는 연구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매년 지역을 바꾸어 가며 하고 있는데 올해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 에서 지난 주 일주일간 열렸었습니다.


워싱턴 DC 는 처음 가보는 곳이 아니라서 지역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나 설레임은 덜하지만 모처럼 5일이나 업무에서 떠나 비행기를 타고 가서 호텔 생활을 하며 지역 식당의 음식을 먹는 것은 저에게는 또 하나의 큰 쯜거움이었기에 참 기쁘게 참석했습니다.


마침 컨퍼런스 개막일 전날 다양한 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진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의학연구가 이루어지는 곳이자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NIH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방문 견학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보안이 심한지 참석전에도 이미 모든 신분 조회를 했어야 했고 이 날도 따로 검색대를 통과하고 제 신분증을 등록하고 조회하는 절차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입장을 위하여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차로 온 한무리의 그룹이 보이더군요. 5-7명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속에서 이곳 미국에서는 보기 힘든 뜻밖의 인물이 보입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쓰까요정으로 유명한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이었습니다.  지금 한참 국민의당 대표위원 선거 때문에 나름 시끄러운 상황일텐데 어쩌면 이렇게 외부에 나와있는게 속편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습니다.  그 옆에는 역시 정치인으로 보이는 다른 분들이 계셨는데 나중에 보니 한국에서 이 행사를 위하여 국회의원 여러명과 장관 대리인들이 오셨던 것이었습니다.


NIH 를 견학하는 투어자체는 그 분들과 저희들이 따로 이루어져서 그날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습니다.  NIH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하자면 이곳 DP 에서도 여러가지 이유로 전세계에서 제일 큰 의학문헌 관련 데이타베이스인 PubMed 나 NCBI 를 검색하시는 분들이 많으실텐데 바로 NIH 가 있는 메릴랜드의 베데스타시의 이곳에 이 데이타베이스들의 서버가 있더군요.  고맙게도 서버실까지도 접근이 관련해서 가까이에서 이를 전세계 의학연구의 중추를 직접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멋진 경험이 되었네요.  


미국에서 연구비를 많이 쓰기로 유명한 NASA 가 연구비로 일년 20조 정도 돈을 쓰는데 NIH 에서 쓰는 연간 예산이 40조이고 이는 NASA 의 두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자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쓰는 연구 단체이므로 미국의 의학 연구에 기울이는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고 20퍼센트 정도를 삭감하려고 하는 것은 함정 ^^).  NIH 다음으로는 같은 날 연이어 NASA 를 방문할 수 있어서 이 비교를 더 선명하게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어쨌거나 5일 정도를 참여하면서 개막식 행사등에서 다시한번 먼발치에서 김경진 의원을 볼 수 있었지만 역시 가까이 할 시간은 나지 않더군요. 한가지 이색적인 것은 미국에서 워싱턴 DC 는 사실상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를 끼고 있는 도시인지라 메릴랜드 주지사와 버지니아 주지사의 대리인들이 이 행사에 참가했는데 메릴랜드 주지사의 경우 부인이 한국분이어서 (토종 한국분 ^^) 이 분이 메릴랜드 주지사를 대신해서 오셨는데 최근에 워싱턴 DC 를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뵈었다고 하시고 매우 한국적인 영어 발음으로 연설을 해주셔서 이채로웠습니다.


회사에서 함께 참여한 동료분께는 여러가지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김경진 의원같은 분이랑 함께 한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놓았으면 돌아가서 다른 한국분들에게 뭐라도 흥미로운 기록이 될 것 같아 좋겠다는 얘기를 그냥 잡담으로 하며 그렇게 일정을 마무리하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 위하여 호텔 앞에서 발렛파킹 되어있는 차를 기다리다가 핸드폰 신호가 잘 안잡혀 일행 분과 좀 떨어져서 길가쪽으로 나가 서있는데 일행분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일행분이 어떤 분과 함께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함께 오는 분은 어랏! 김경진 의원이었습니다.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했지만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일단 인증사진을 하나 찍었습니다 (나중에 이 분이 말씀해 주시는데 제 말을 기억해 두셨다가 김경진 의원이 마침 혼자 나가는 순간에 그 분을 붙잡아서 저에게 데려왔다고 하시더군요. ^^)




그 후 나란히 서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한때 민주당 중진이셨던 외가 친척분 얘기를 하니 반색을 하시면서 명함을 꺼내서 주시더라구요.  나중에 보니 핸드폰 번호에서부터 이메일 주소까지 적혀있는 개인용 명함이었는데 자신의 이메일로 Gmail 을 쓰시는게 이채롭더군요.  뭐랄까 대한민국 국회 공식 이메일이 아닌 지메일 주소가 있어서 정말 개인적인 용도의 명함이겠구나 지레 짐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정신없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찌나 태도가 공손하신지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제가 만나보았던 국회의원들은 뭐랄까 어깨에 힘이 들어간, 뭔가 대접 받는데 익숙한 그런 분들이 많으셨는데 일면식도 없이 예정에 없는 만남에도 불구하고 제 이야기도 잘 들어주시고 상대를 존중하는 배려가 몸에 배어 있으시더라구요.  청문회 때 보았던 예리함과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어서 이채로웠습니다.


그 짧은 이야기 도중에도 저와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님이 함께 해주셨던 뉴스포차의 팟캐스트 뉴스포차 이야기를 잠깐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 덕분에 김경진 의원을 외국에 있는 제 주변 분들이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하니 ‘그 프로그램한게 시간이 좀 되었잖아요’ 하면서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더라구요.


그렇게 잠깐의 대화를 나누고 저희 차가 나오는 바람에 그 분을 보내드렸는데 보좌관이나 주위에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일정 소화를 위해서 가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고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같이 가신 동료분이 제가 대화하는 것을 찍어서 보내주었는데 바로 김 의원이 제 이야기에 빵 터져서 웃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랏?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저조차 생소한 장면이라 어떤 순간이었나 기억을 거슬러보니 어떤 대화를 나누던 장면인지 바로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짧은 대화 때문이었습니다.


샴페인: 요즘 국민의당 돌아가는 상황이 많이 깝깝하시죠? 

김경진 의원: 죽겠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구체적인 이름을 적시하지 않은 대화였지만 말하는 저나 답하는 의원님이나 매우 함축적인 대화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던 그런 순간이었고 그 짧은 순간에 공감이 이루어져 아마도 저렇게 빵 터졌었던 같습니다.  이 사진을 보니 예전에 지인이 좋아하시는 바람에 (물론 저도 팬인) 왕년의 아이돌 가수 이지연씨를 아틀란타까지 가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게 찍혔던 기억도 함께 나는군요 (이곳에도 소개한 적이 있어 혹시 기억하는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억속의 우상 그녀를 만나다사진 클릭하시면 이지연씨 만나뵌 글로 이동합니다



그게 금요일 밤의 일이고 어제 토요일에 비행기를 타신다고 했으니 지금은 김경진 의원 한국으로 돌아가셨겠군요.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미국에 있는 과학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기회가 있었다면 미국에 있는 과학자들의 애환과 건의가 전달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이번 컨퍼런스에 과거에 장관을 하시고 한때는 대통령 후보까지 하셨던 원로 정치인 한분이 오셨었는데 저희 분과 발표장까지 오셔서 이런 저런 개인의 의견을 제시하며 저희와 얘기를 나눴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거든요 (물론 그분께서 조금은 뜬금없는 정권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셔서 저희랑 생각이 많이 다르시구나 하긴 했었습니다)


사실 저는 미국에서도 아주 작은 도시에 살고 있어 알려진 사람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대도시인 서울에 살 때보다도 더 많은 유명인들을 이곳에서 직접 만나볼 기회가 있었던 것은 개인적인 큰 행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록 국민의당이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요즘이지만 청문회에서 정말 날카로운 표정을 보여주시고 개인적으로는 무척 배려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김경진 의원의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작으나마 기대를 걸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별것 없는 긴 글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감사합니다.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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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돌아오는 8월 22일이지만 올해 8월 22일은 저에게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입니다.  제가 이곳 미국에 온게 바로 정확히 20년전, 1996년 8월 22일이었거든요.


아무런 입학 허가도 받지 않고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대학교의 Computer Science 과의 대학원생이 되는 꿈을 안고 영어연수생의 신분으로 도착을 했습니다.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도착했던 당시의 기억들, 정착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했던 기억들, 아직도 생생하네요.


한국에서 잘 다니고 있던 제법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하여 필요한 TOEFL 과 GRE 를 이곳에서 준비하겠다고 제가 가장 가고 싶은 학교를 선택해서 과감히 왔고 정작 모든 응시 과정을 거쳐서 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2년후였습니다.  


아내는 항상 저에게 이렇게 오래 미국에 있을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긴 학위과정, 많은 사연끝에 학위를 마치고 나니 40이 훌쩍 넘고 나서야 직장을 잡고 바로 대학교에 들어가는 아들 녀석을 뒷바라지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미국에서 사시는 분들 적어도 몇번 이상은 사는 곳을 옮기기 일수인데 저는 이 오랜 기간 동안 처음 발을 딛은 도시에서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쩌다 한번씩 가면 정말 환영해 주는 많은 친구들, 온라인 상에서 제가 쓰는 글을 읽고 격려해 주시는 많은 분들, 언제나 내 곁에서 함께 해주는 가족들, 그리고 가족만큼 마음이 가는 동네 분들 등 많은 분들 덕분에 이렇게 외롭지 않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조용히 저의 미국 생활 20년을 한번 자축해 봅니다. ^^  저 참 수고 많았어요.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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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국에 살고 있으며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한번 한국에 나가려면 비행기 값만으로도 여간 큰 돈이 들기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는 일은 4-5년에 한번이 고작입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해야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수기에 비행기표를 구입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비행기표 가격만 약 6백만원에 3-4주간의 용돈들을 포함하면 사실 4-5년만의 방문 조차도 여의치는 않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한국을 가야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한번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연로하신 두분의 부모님과 두분의 장인/장모님이 생존해 있는 장남이자 사위로서 새벽쯤에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나 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저희 집의 전화하나를 한국의 070 전화를 받는 전용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는 전화는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큰 애가 대학에 가고 나서는 일체의 가족여행을 가거나 휴가를 쓰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12월 연말에는 일년간 쓰지 않은 휴가가 쌓이게 되어 안 쓴다고 돈으로 계산해 주는 것도 아닌지라 언제나 12월 연말에는 거의 한달을 놀게 됩니다.  절친한 직장 동료들도 이런 저를 잘 알기에 아예 여름쯤이면 흔히 하는 대화인 올해 휴가 어디로 갈래 대신에 '넌 올해도 12월 한달을 놀겠구나' 라고 아예 대놓고 얘기하곤 합니다. ^^

 

그런 휴가를 앞둔 작년 12월초 아주 늦은 저녁시간에 말씀드린 그 전화기가 울립니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에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그것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직계 가족도 아닌 고모님께서 'XX 야, 니가 지금 한국에 나와봐야겠다' 라고 딱 한문장 하시고 다시 울음을 터트리시는 것을 들으니 왠만한 스릴러 영화는 저리 가라 할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흐릅니다.

 

경직된 나의 표정을 본 아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저 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가야될 것 같아"

 

다행히도 부모님에게 큰 일이 당장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급히 나가 봐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생략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도 마일리지 티켓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몇십년간 단 한번도 쓰지 않은 마일리지가 조금 있었거든요 (몇십년이라도 실 방문수는 별로 안됩니다).  다행히 한장의 마일리지 티켓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제가 끝내고 가야할 일이 있어서 3-4일 후 휴가가 시작되는 날로 맞추어서 마일리지를 끊었습니다. 이코노미에는 마일리지 자리가 없어서 평생 타본 적이 없는 비지니스를 끊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비지니스를 처음 타고 싶지는 않았는데라는 불경한 생각이 그 순간에도 잠시 스쳐갑니다.

 

어차피 직장에 가서 얘기를 해도 휴가가 시작하는 날짜에 귀국을 결정했으니 업무에는 차질이 없습니다만 한분도 아니고 2-3명의 상사들이 왜 당장 떠나지 않느냐고 이해를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급하게 왔습니다.  보통 한국에 나올 때면 2-3달 전부터 차곡차곡 계획을 짜고 만날 분들을 정리하고 그 분들께 일일이 전화해서 편한 시간을 잡아서 스케쥴을 꼼꼼히 짜고 옵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가가 전주인데 한국에 있는 동안 70% 정도는 서울에서 거주하고 30% 정도만 전주의 부모님 댁에 머무는데 그 이유는 제가 만나야 하는 분, 지인들, 친구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고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에 고향에 오래 대부분 머물 작정을 하고 왔습니다.  2주 반 정도의 일정을 잡았는데 사실상 3주가 넘는 휴가가 있었음에도 그래도 내 가족 내 자식들에게도 연말의 작은 시간을 할애해 주고 싶은 이기적인 생각에서였습니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라 그러나 봅니다.

 

언제나 한국에 도착하게 되면 일단 서울의 처가댁에 들렸다가 숨 좀 돌리고 내려가는게 한번도 변하지 않은 저의 귀국 일정인데 바로 인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합니다.  참 편리하게 되어 있더군요.  공항에서 전국 주요도시로 아주 쾌적한 버스편으로 바로 갈 수 있으니..  4년만에 보는 창밖의 풍경은 변한게 별로 없었을 터인데도 이상하게도 이국적입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서인가요?  직장생활하면서 예전에 고생했던 경기도 화성 근처를 지나는데 상전벽해라고 할만큼 많이 변했더군요.  화성, 발안, 향남 이런데는 참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미친듯이 챙겨서 혼자서 홀홀단신 귀국했던 것과는 달리 상황은 많이 호전되어서 부모님 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오전에서 오후 6시까지는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현직에 종사하고 계셔서 가업의 현장에 나가서 같이 앉아있는게 고작이었지만 말입니다.  아침 일찍 아버지가 나가서 문을 열고 어머니랑 제가 오전 9시 넘어서 나가서 교대하면 아버지가 볼 일을 보시고 다시 오후에 돌아오시면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돌아오고 제가 집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드시고)  나중에 아버지가 문을 닫고 들어오시는 그런 패턴입니다.

 

그런데 저의 한국 방문을 알게 된 초등학교 친구들의 성화가 장난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곳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네이버 밴드를 통하여 다시 만났고 한국에 갈 수 없는 저를 위하여 친구들이 저희 부모님이 일하시는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사진을 찍어서 저에게 보내준 나름 저에게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혹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 동창들 때문에 눈물 좀 흘렸습니다 라는 글이었습니다)

 

37년이상 심지어는 40년 동안을 한번도 다시 본 적이 없는 친구가 미쿡(오타 아닙니다. 걔네들이 이렇게 부릅니다 ^^)에서 왔다고 만나자고 성화입니다.  어차피 저녁 7시 이후쯤에는 어머님도 잠자리에 드시니 친구들 좀 만나도 되겠다는 자기 합리화도 좀 했습니다.  그렇게 모임이 만들어지고 저는 근 40여년만에 사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초등학교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가게 됩니다 (그래도 서울에 사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은 여러 계기로 소개한 적이 있지만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은 처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멋진 옷 같은 것은 저에게도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이곳 미국 생활은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서 좋습니다) 급하게 온 한국에 들고 온 옷가지도 변변찮아 아무거나 주워입고 마침 우리 아파트 근처에 살아 가끔 저희 부모님을 챙겨주고 제가 이곳 프차에 올린 학위를 따기 위한 수기 글을 인쇄까지 해서 부모님께 전해주었던 친구를 38년만에 만나 그의 차를 얻어타고 또 다른 동창이 운영하는 족발집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이 친구는 제가 얼굴을 잘 기억하는 친구입니다. ^^

 

그 모임을 좀 일찍 나가서 자리에 앉고 속속들이 친구들이 도착하는 순간 알았습니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내 동창들, 특히 여자동창들은 정말 너무나 멋지게 차려입고 왔더군요.  저를 빼고 총 20명이 참석을 했고 그 중 11명은 여자동창이었습니다.  여자동창 친구들은 다들 정말 젊어 보였고 참 세련된 옷차림이어서 저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입담이 예전부터 걸죽했던 친구가 크게 한마디 합니다 (친구의 말을 그대로 전하느라 아래의 글에 비속어가 들어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년들이 애인 만나러 왔냐????"

 

거친 말투에 깜짝 놀랐지만 바로 옆에 앉은 여자동창이 원래 우리 자주 만나서 이러고 지낸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아마도 그 친구가 보기에도 제가 굉장히 놀라는게 느껴졌나 봅니다. ^^

 

다행히 만나고 보니 그 오랜 격차에도 불구하고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르더군요.  제 세대는 여학생들과 친하게 지낸 세대가 아닌데다가 제가 당시에 임원 같은 것을 해서 여자급우랑 이야기만 나누어도 화장실에 "XX 이는 누구랑 연애한대요" 낙서가 올라오던 시대였고 그로 인해 학교 안다닌다고 울고불고 했던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었던지라 애써 여학생들을 외면하고 살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친구들 얼굴과 기억들이 떠오르더라구요.  무려 40년전에 만났던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죠.

 

당시 저는 부모님이 전문직에 계셔서 비교적 유복하게 사는 편이었는데 이 날 참석한 친구 중의 하나는 우리 집에서 케익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먹어보았다 그래서 그 때 그 친구가 궁금해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에서 왔다라고 해서 저를 놀라게 하였고 조금 늦게 도착한 친구는 평택에서 전주까지 3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버스를 타고 달려와 주어서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집에서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정작 저는 기억이 아주 상세하게 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참 많은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많은 일을 함께 했더군요. ^^  동창친구들이 들려주는 저의어릴 적 모습은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저에게는 낯설게까지 느껴지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들은 끊임이 없었고 이날 모임이 열린 동창 친구가 하는 족발/갈비집의 양념족발은 평생 처음 먹어보는 기막힌 맛이더군요.  나중에 제가 집에 혼자 있게 된 날 어머니도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저녁을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카톡으로 마침 연락이 되어서 저에게 족발을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배달을 하지 않는 식당인데 어찌 보내냐 했더니 한국은 음식도 오토바이 택배로 배달이 되더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도 이 족발 맛이 생각나서 침이 고이고 있습니다. 잘게 썰은 뼈가 붙은 아주 매콤하고 칼칼한 족발은 정말 최곱니다. 쓰읍… )  단언컨대 식문화에 관한한 한국은 세계 최고입니다. ^^

 

"너네들 집에 안가도 되냐?"

 

대부분 가정이 있는 친구 그것도 여자동창들의 경우 모임이 평일 그것도 새벽 3시를 넘어감에도 함께 해주는 것에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더니 다들 얘기하고 나왔으니 걱정말라고 하는데서도 또 한번의 문화컬쳐를 느꼈습니다 ^^  그렇게 새벽 3시 반을 넘어서 첫 만남이 끝났고 저는 정말 아주 아주 오랜만에 제가 모임의 주인공이 된 그런 황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지인들을 만나뵈어도 처음 10분 정도의 안부 이후에는 모인 분들 각자의 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렇게 만나서 헤어질때까지 제 이야기만 하는 모임은 아마 없지 않았나 싶을만큼 친구들은 저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미국에서의 생활 이야기 또 각자의 이야기들로 정말 저만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인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렇게 단 한번의 멋진 만남으로 기억되고 끝날줄 알았더니만 저의 고향 친구들은 참으로 지독하게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더군요.  총 7번의 모임을 했습니다.  '니네들 징하다' 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  

 

저 하나 보자고 나와준 친구들이 궁금해서 일일이 기록해둔 이름들을 세어보니 총 72명의 초등학교 동창이 참석해 주었더군요 (물론 중복 인원 덕분에 숫자가 많아졌습니다만 ^^).  그 중에 서울에서 열린 한번의 모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모임을 개근해 준 친구도 있었고 새벽 3시에 공항가는 버스를 타야하는 마지막 날 밤 7시에 저를 불러내어 마지막으로 못 먹어본 것 다 사주겠다고 하여 그동안 전주에서 놓치고 갈뻔했던 소머리 국밥과 양념통닭을 사주면서 저를 10시까지 붙잡았던 4명의 여자동창 친구들은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50이 되었음에도 변변하게 돈을 벌지 못하는 아들에게 너를 보러오는 친구들 대접은 니가 다해라고 쾌히 아버지가 신용카드를 쾌척해 주셨음에도 제 친구들은 티안나게 몰래 몰래 계산을 했더라구요. 어쩐지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갈비와 족발과 술을 양껏 먹었음에도 20만원쯤 나와서 한국이 생각보다 참 싸구나 생각했던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었습니다. ^^

 

그런데 정작 저를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야기는 이제야 등장합니다. ^^  고향을 떠나기전 마지막 공식 송별모임에서 한 여자동창이 명함식으로 된 USB 메모리를 하나 슬쩍 건네줍니다.  

 

"미국 가면 봐"

 

USB 메모리? 아 사진을 담아 주었나보구나.   이제 80이 되어가는 아버지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그 새벽 3시에 도착한 버스 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로 도착한 공항의 라운지에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USB 메모리를 노트북에 꼽아 봅니다.

 

"안녕 XX 야~~~"

 

메모리 속에는 뜻밖에도 동영상이 담겨 있었고 동영상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 곡만큼은 피아노로 직접 연주해 보고 싶다고 꿈을 꾸었었고 50이 다된 나이에 그 꿈을 이루었다고 한번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던 '문리버 (Moon river)’ 음악이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자식들 센스 하나는 정말… ^^;;

 

그 동영상 속에서 동창 친구들은 하나씩 돌아가면서 저에게 메시지를 남겨주고 있었습니다.  장소를 보아하니 모두 모임이 있던 곳입니다.  한번도 아닌 여러번에 걸쳐 찍은 것들입니다.   아마도 제가 화장실에 갈때나 다른 친구들하고 핸드폰으로 연락이 되서 통화하고 있을 때 찍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USB 메모리를 건네 준 여자동창 친구가 열심히 편집을 해서 음악을 넣고 자막까지 넣어서 동영상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50이 다된 아주머니가 컴퓨터를 들여다 보면서 한땀 한땀 편집했을 장면을 생각하니 울컥합니다 (선아야, 고마워~~),

 

이 세상의 몇명이나 40여년을 못 본 많은 어릴적 친구들의 격려의 말이 담긴 동영상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더더욱 감동이었습니다.  지금도 조금만 힘든 모습으로 축쳐져서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놀리듯이 친구들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얘기합니다.

 

"안녕 XX 야~~~ 나 누구야  깔깔깔"

 

그리고 항상 정색을 하며 얘기를 더합니다.

 

"자기 힘을 내… 자기에게는 이렇게 자기를 응원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

 

분명히 아내에게 놀림을 받는 건데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도 이 친구들의 동영상은 제 핸드폰에서 제가 조금 쳐질 때마다 보는 단골 동영상이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동영상을 넋놓고 보고 있다가 지나가는 자녀들에게 아빠 동창 친구들이 아빠를 초등학교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자랑을 해도 '풋' 하는 표정으로 관심도 없이 지나가버리는게 좀 깨는 일이긴 합니다만..   하긴 발톱이나 뜯고 응접실 소파에서 코를 골고 널부러져 있는 아빠가 저런 아이돌 어쩌고 하니 기가 막힐 것 같긴 합니다만…  이 놈들아 니네 애비가 한때는 엄청 잘 나갔다고!! 흥!!!

 

결국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화들짝 마음을 졸이고 달려온 한국에서 정말 오래 간직할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저에게 언제나 힐링이 되어줄 평생의 선물을 하나 받고 온 저는 참 행운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몇자 적자고 했던 것이 이렇게 길어져 버렸고 짧은 방문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건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던 공부와 직장생활로 언제나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 나름 한 찌질하는 소시민인 저에게도 이런 멋진 일이 생기기도 하네요.

 

마음 같아서는 동영상을 공개해서 자랑도 하고 싶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여자동창 친구들의 소중한 초상권 보호를 위해 그리 하지 못함을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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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국을 떠나온지 제법 되어서 한국의 초중고생들이 여름방학을 지금 맞이하고 있는지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미국에서는 5월말에 초중고 및 대학교까지 방학을 하여 무려 석달이나 되는 방학기간을 맞이하고 있으며 대학 도시인 제가 살고 있는 이 곳은 덕분에 엄청 한산합니다. 

 

미국은 보통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4년이 고등학생 기간이며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독특하게도 8학년부터 12학년까지 5년제로 되어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9월에 학기가 시작되면 11학년(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아이는 본격적으로 대학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통 미국에서는 11학년이 끝나기전에 입시를 모두 마치고 한국의 고3이라고 할 수 있는 12학년에는 입시를 준비하기보다는 학교에 직접 응시를 하고 대학을 결정하는 1년간을 거치게 됩니다.

 

한국처럼 입시준비를 위해 가능한 모든 시간을 투자하는 분위기가 아닌지라 딸아이는 긴긴 여름방학동안 뭘할까 하다가 이제 고1에 불과하지만 동네의 한국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알바와 병원에서 의료 자원 봉사를 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식당 서빙이야 정해진 시간에 가서 손님들 주문받고 상 치우고 주방 스텝들 돕는 일들이고 만 16살임에도 운전을 시작한 탓에 혼자 차를 몰고 가서 돈도 벌면서 노동의 고달픔을 몸소 배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끔씩 식당 스텝들과 함께 하루일을 정리한 저녁이면 한국의 설빙 스타일로 만들어 팔고 있는 빙수를 나누어 먹다가 못내 아쉬운지 저희 부부에게 전화를 해서 멀지 않은 식당으로 현찰을 들고 가서 정식으로 다시 주문을 해서 함께 빙수를 나누어 먹는 일은 저희 가족의 새로운 여흥거리가 되었고 이렇게 먹는 빙수는 정말 맛있습니다 (얼음이 아주 자그마한 바늘 스타일로 떨어지는 방식인데 설빙 스타일 이렇게 부르기는 하지만 전 설빙 빙수를 먹어본 적이 없어 직접 비교가 안됩니다.  다만 한국에서 들여온 정말 엄청 고가라는 그 빙수 기계를 집에다 사다 놓고 싶을만큼 맛납니다 ^^).

 

또 다른 일인 의료 자원 봉사는 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 동네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것이고 병원 일이어서 그런지 초반 요구사항이 많았습니다. 특히 딸 아이는 어렸을 때 수두를 앓아서 수두에 관한 접종 증명을 할 필요가 없는데 병원에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다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건강 증명 테스트가 몇개 있어서 무려 저희 돈을 25만원이나 들여서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병원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요구 사항이 있음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자원봉사 하면서 내 돈을 엄청 들여야 하는 상황이 좀 웃음이 나기는 했습니다. ^^

 

하지만 병원 이름이 떡 박힌 목에 걸고 다니는 포토 ID 를 매고 깔끔한 남방과 단정한 바지를 입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딸 아이를 내려다 줄 때면 뭔가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딸을 키워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하이틴으로 불리우는 딸아이가 집 안에서 꼴보기 싫은 순간도 사실 많거든요. ^^

 

그러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이제 오늘만 버티면 이틀 노는구나 하고 어떻게든 하루를 때워야지 하는 금요일 오전 딸아이로부터 카톡이 옵니다.

 

"아빠 혹시 엄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미국에 살고 있지만 항상 카톡만은 한글로 하는 가족간의 불문률을 잘 지키는 딸아이의 메세지였습니다. 아마도 엄마에게 뭔가 물어볼게 생긴 모양입니다.

 

"모르겠는데?" (속마음이야 '얘야 아빠는 회사에 있는데 그걸 어찌 알겠니?" 였지만 말이죠 ^^)

 

딸 아이의 답변이 바로 이어집니다

 

"음, 알겠어"

"그래도"

 

이후 "Thank You" 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귀여운 춤추는 이모티콘이 아래에 찍혀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래도'는 그냥 오타였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제가 20년을 배운 유창한 영어로 딸아이에게 한마디 합니다.

"You are welcome"

 

그렇게 다시 시간아 어서가라 아몰랑 모드로 얼릉 돌아갑니다.  그런데 1시간도 지나지 않았을까 또 카톡이 또 울립니다.  별로 카톡을 받을 일이 없는 중년의 인기없는 사내에게 카톡은 그리 빈번히 울리는 물건이 아닙니다만 이번에는 아내였습니다.  더구나 딸아이랑 아내가 평일 점심도 되기 전에 카톡이 바리바리 오는 경우 또한 흔치 않긴 합니다.

 

여러줄로 보내진 아내의 카톡은 딸아이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와 있다는 겁니다. 잠시 머리가 멍했습니다.  병원 안에 있는 아이가 응급실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도저히 카톡만으로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 전화로 연결을 하였고 나중에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실 병원에서 평범한 고등학교 여학생의 자원봉사란게 대개는 환자 떠난 침대를 정리하거나 서류 복사 혹은 청소 등으로 매우 허드렛일이며 이런 점 때문에 이름은 근사하지만 막상 하고난 학생들이 불평이 많다는 얘기를 딸아이에게 진작에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부서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어 소화내과를 선택해서 간 딸아이는 마침 지금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선배님이신 의사를 만나서 매우 기본적인 일 이외에도 진료를 하거나 처치를 하는 병실에 함께 들어가서 친절하신 선배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가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뜻밖의 호사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는 위내시경을 하는 환자방에 함께 들어갔는데 일반적인 주기적인 건강진단으로서의 위내시경이 아닌 듯 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는 내가 한번 점검해 보고 싶다고 위 내시경을 할 수 없습니다. 의료 보험 회사에서 먼저 사전허락(pre-approval) 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돈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하면 할수는 있는데 이때 비용은 우리 동네의 경우 350만원 정도 합니다. 35만원 아닙니다. 아내가 한번 한 적이 있을 때 물어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환자 관련 내용이야 딸아이나 저도 모르지만 마취가 잘 먹지 않는 상황에서 내시경을 꽂아 놓은 구강에서 계속해서 피가 솟구치는 조금은 아찔한 상황이었나 봅니다.  딸아이의 얘기를 빌자면 속이 메슥거리면서 몸이 떨려오더랍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실 밖으로 나와 잠시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순간 깜박 조는 느낌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있더랍니다.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이 인지가 되고 사람들은 모여 있는게 아니고 자기를 내려보고 있더랍니다.  즉시 응급실(ER)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살짝 정신이 든 딸아이가 저에게 카톡을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아빠는 일해야 하니까 생각이 들어서 엄마를 찾았던 모양입니다.

 

응급실로 옮겨진 딸아이는 즉시 채혈검사 및 엑스레이와 심전도(EKG) 검사까지 행해진 모양입니다.  마침 저희 집 근처의 산책코스로 핸드폰도 놓고 걷기 운동을 나갔던 아내는 뒤늦게야 전화 연락을 받고 부랴 부랴 응급실로 와보니 딸아이는 손가락에 심장박동수를 점검하는 센서를 꼽고 기절하며 쓰러질 때의 충격으로 빨갛게 부어 올라 멍이 든 이마를 한채로 누워있더랍니다.

 

예전에 토네이도를 쫓아 다녔던 Storm Chaser 였다는 간호보조원 할머니는 행여라도 미래에 의사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어린 소녀에게 의사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다정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고 간간이 들리던 응급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의대 해부학 시간에도 이런 일은 흔하고 몸이 떨렸던 것은 발작(seizure)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떨림(shaking)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 일이 계속 자원봉사를 하거나 나중에라도 의사가 되는 것에 전혀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안심을 시키고 가더랍니다. 그 밖에도 간호사 분들이 참 따뜻하게 이야기를 해주더랩니다 (그러나 미국생활 20년차인 저희는 이 친절함이 나중에 어마어마한 청구서로 돌아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

 

다행히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으로 나왔고 지금은 집에 와서 편안히 누워서 멍이 든 얼굴 부위를 얼음 주머니로 문지르고 있는 중입니다.  아내의 말로는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병원비가 많이 나올테니 자기가 반을 내겠다고 얘기하는 딸 아이가 무척이나 안스러웠다고 얘기하더군요.

 

가끔은 사춘기 특유의 반항기로 얄밉기도 했던 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저도 참 안스럽고 우습게도 그 어느때보다도 사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몸이 닿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딸인지라 따뜻하게 안아주지는 못했지만 나름 최근에 모아놓은 모든 사랑을 주섬주섬 모아모아 아주 아주 따뜻하게 얘기를 건네주었습니다.

 

사실 딸아이는 의사를 꿈꾸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늘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아니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집에 물난리가 난 이후 길게 쏟아지는 비가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도 비가 많이 오거나 천둥이 치면 안절부절 못하는 딸아이인지라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 이번주만이라도 평소의 툴툴대는 아빠가 아닌 딸아이를 세심하게 보듬어 주는 아빠가 한번 되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바램은 다시 병원 출입증을 당당하게 목에 걸고 병원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기는 하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  아내 이야기로는 같이 일하던 사람들 앞에서 쓰러졌던 자기 모습이 쑥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축구장과 농구코트를 누비면서 선수생활을 했던 딸 아이는 잘 이겨내리라고 믿습니다.

 

적지 않게 놀란 하루이지만 이렇게 돌이켜 보면서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갈 수 있는 지금이 사실 무척 감사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말 끊임 없는 놀라움의 연속임에 틀림 없습니다. ^^

 

P. S. : 지금 다시 보게 된 딸아이의 카톡 메세지는 아무래도 오타가 아닌 "그래도 (아빠 혹시 여기로 좀 와줄 수 있겠어?)" 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왜 엄마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라고 묻지 않았던 비정한 아빠인 듯 하여 참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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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Disclaimer]: 이 후 기술되는 글은 특정 자동차 업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며 또한 해당되는 특정 차종의 전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글도 아닙니다.  오히려 차량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일하게 대처했던 한 사용자의 자기 반성이며 이 글로 인해 관련업체에 근무하거나 해당 차종을 운행하시는 분들에게 불쾌감을 주려는 의도 역시 없음을 밝혀드립니다. 아무쪼록 너른 이해 있으시기 바라겠습니다.


저에게는 약 26만 킬로를 운행했던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가장 많이 팔린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도요타 사의 프리우스 차량이며 9년 2개월동안 운행하면서 빼어난 연비로 많은 돈을 절약해 주었고 단 한번의 기계적인 결함이나 고장이 없어서 참으로 만족했었던 차입니다.  그러나 22만 4천킬로를 뛰고난 후에 하이브리드 차에서 엔진이나 다름없는 동력 배터리 팩 중 한개가 수명이 다해서 직접 교체한 적이 있습니다. 그후 25만 6천킬로를 뛴 후에 두번째 배터리 팩의 수명 문제로 다시 교체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두번의 수리는 이 블로그에도 간단히 기술을 했기에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이렇게 두번의 배터리 교체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어쩌면 제가 한국 사람 중에는 프리우스 배터리 수리에 관한 한 정말 많이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교만한 생각을 품기도 했습니다. ^^ 인터넷 상에도 프리우스 배터리 자가교체에 관한 한글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고 두번의 제법 큰 수리를 통하여 정말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배터리 교체라는 단어에서 시동용 12V 배터리를 교체하듯이 간단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차량 뒷부분의 좌석 및 트렁크를 모두 다 들어내는 대공사이며 자동차 제작사가 개별적 배터리 교체를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은 탓에 50Kg 에 달하는 배터리를 완전히 분해하여 그 안에 든 28개의 배터리 팩을 재배열 하고 교체해야 하는 제법 난이도가 있는 작업입니다. 또한 200 볼트가 훌쩍 넘는 전기와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안전에 많은 주의를 요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그래도 공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수많은 자료를 읽고 행한 작업이기에 나름 훌륭하고 안전하게 두번의 교체작업을 끝냈습니다. ^^

 

그러다가 올해 초에 다시 배터리 경고등이 올라왔습니다.  

 

"이런, 또 교체해야 하는거야?"  

 

이미 두번의 경험을 했기에 그냥 귀찮은 일 한번 더 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작년말에 저희 집에 오셨던 전기 관련 전공하셨던 지인분께서 배터리라는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기에 앞으로 계속해서 하나씩 고장날 거다라는 예언이 정확히 들어 맞았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저는 이런 과정을 방지하려고 신경을 써서 배터리를 교체하고 제가 직접 제작한 허접한(^^) 장비들을 이용하여 배터리 간의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일이었던지라 미홉한 부분등이 많았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앞으로도 자꾸 고장날 것을 대비해서 이번 기회에 통채로 배터리를 교체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랑 아내는 이 차를 45만 킬로 이상 타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미국에서 프리우스 2세대의 전체 배터리 가격은 세금을 포함하지 않고 $2,588.67 (약 305만원) 이고 세금을 포함하고 수리비 (인건비) 약 70만원을 포함하면 4백만원이 넘는 비용이 드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높은 연비로 절약한 돈이 훨씬 큰데다가 앞으로도 최소한 20만 킬로 이상을 더 탈 수 있다는 생각에 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히기도 했습니다.

 

여기 저기 딜러들을 접촉하면서 순정 배터리를 좀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연구도 해보고 도요다 정품이 아닌 써드파티에서 나온 백만원 이상 싼 품질 보증이 되는 재생 배터리는 어떨까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실제 리셀러들에게 전화해서 가격을 일일이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두번이나 수리를 했었고 정확히 어디가 문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고가 나올 때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단돈 2만 5천원짜리 블루투스 OBD2 스캐너를 통하여 차량의 체크엔진 (check engine) 경고를 리셋해가며 차에 더 이상 무리가 가지 않도록 꼭 필요할 때에만 살살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 급하지 않게 여기 저기 가격 체크도 하고 살살 차량운행도 하고 있었는데 사건이 터진 것은 3월 초로 기억합니다.   축구 연습을 마친 딸아이를 데리고 어둑해져가는 길거리를 달려 큰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어서 전진하려고 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빵!!!!!!!!!!!!!!!"

 

딸아이와 저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파랗게 질린 딸아이의 첫마디가 저의 귀를 때렸습니다.

 

"아빠, 이 것 우리 차에서 난 소리 맞지????"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배터리가 터졌구나.   마치 뒷자리에서 폭죽 하나가 터진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즉시 비상등을 켜고 아직도 시동이 꺼지지 않은 차를 몰아서 일단 교차로를 지나쳐서 길거리에 차를 댔습니다.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집까지는 겨우 3-4 킬로, 그냥 살살 몰고 갈까?'

'아니야, 하이브리드 차가 불도 난다는데 화재에 휩쌓이면 어쩌지?'

'아이고 미리 배터리를 갈 걸...'

 

그러나 정작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겁에 질린 딸아이를 달래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차안에서는 매캐한 탄 냄새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더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바쁜 퇴근시간의 2차선 도로 중 하나를 막고 있기가 싫어서 50여미터를 더가면 있는 소프트볼 야구장의 주차장에 주차해야겠다는 빠른 판단이 섰습니다.

 

마침내 차를 넓직한 곳에 세우고 딸아이를 진정시켰습니다.

 

"수빈아, 아빠가 이거 배터리가 하나 터진 것 같아. 아빠가 아주 잘 아는 문제이고 다행히 더 이상 문제는 없을테니 걱정마"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 아이를 데려가게 했습니다.  나중에 아내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내가 데리고 가는 차 안에서 많이 울더랍니다.  많이 놀랬나 봅니다 (나중에 딸아이는 계속 그 차를 계속 타게 된다면 그 교차로를 지낼때마다 움찔움찔 할거라고 얘기하더군요).

 

저는 일단 차가 있는 곳에서 보험회사에 견인요청을 했습니다.  차를 직접 몰기 시작한게 80년대 후반이니 근 30년을 차를 몰았는데 그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차량 견인을 하려니 참 이상했습니다. 요즘은 엡이 잘 되어있어서 보험사에 전화할 필요없이 엡을 이용하여 차량견인을 요청하고 현재 위치가 자동으로 GPS 로 전송되니 참으로 편리하더군요.

 

저의 집에 견인할까 딜러 수리센터로 갈까 고민하다가 혹시 몰라 딜러 수리센터로 차량을 견인해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을 달랬습니다.  다음날 딜러에게 어느 정도의 문제인지 어느 정도의 피해 정도가 있었는지 물어보았더니 차량을 켜자마자 연기가 차안을 가득 매워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고 차량을 뜯어서 정확한 원인을 조사하는데에는 초기 진단비용 11만원 이외에도 40만원 이상이 더 필요하다기에 일단 모든 진단작업을 중지를 시켰습니다. 

 

그 후에는 계속되는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차를 주행해서 결국 폭발로 이르게 한 저의 나태함을 자책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고민은 과연 이 차를 수리해서 계속 탈 것이나 아니면 이 기회에 차량을 바꾸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뭐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아무 고민없이 차를 바꾸었겠지만 빡빡한 저의 형편에서 새로운 차량 구입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한번 차량을 구입하면 폐차할 때까지 탄다는 우리 부부의 기본 가치관에서 아직 26만 킬로는 더 탈 수 있는 주행거리였기 때문입니다 (^^).

 

그래도 나름 쓸만한 부품이 아직은 남아있는 차였기에 혹시나 해서 이 차를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알아보니 딜러에서는 기본 진단비용으로 내가 내야할 10만원을 빼주겠다는게 전부였고 (그러니 차를 날로 먹겠다 이거죠, 도둑넘들 ^^) 몇몇 차량 재활용 업체와 폐차장을 전전하면서 알아보니 제시하는 가격은 30만원부터 110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었기에 계속되는 고민에 휩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내와의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아쉽지만 안녕을 고하고 새 차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엑셀 스프레드 시트를 통하여 제 차의 킬로미터당 차량운행비를 계산해 보니 설사 이 차로 한푼도 보상을 못받는다고 해도 옆자리의 경차를 타고 좋은 가격에 판 동료보다 킬로미터당 차량운행비가 쌌기 때문에 손해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녜, 저에게는 이 차를 팔고 새 차를 사야할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

 

그동안 프리우스를 참 사랑했기에 저는 다음 차도 마침 막 출고된 프리우스 4세대를 구입하고 싶었고 딜러에서도 이때다 싶어서 딜러가 한명 달라붙어 새 차를 시승시켜주며 저를 유혹하기 시작했고 날로 먹겠다는 제 운행불가 프리우스도 30만원이나 쳐주겠다는 후한(^^) 오퍼까지 제시했습니다.  프리우스 4세대는 참 좋더군요. ^^

 

그러나 평소 자기 의견을 별로 개진하는 편이 아닌 아내는 조심스럽게 이번에는 그냥 배터리가 아닌 가솔린 차량으로 가자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하이브리드 차는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배터리가 소모되기 마련이고 정말 폐차까지 타기에는 중간에 배터리 교체라는 관문이 다시한번 닥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집도 저의 완전한 개인적인 취향으로 제 맘대로 선택했고 프리우스 역시 제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차였기에 이번에는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무조건 아내가 선택하는 차를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전 최악의 남편은 아니니까요. 훗!

 

그리고 운행이 불가한 제 프리우스는 지난번 두번의 배터리 교체를 하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고 저에게 중고 배터리 팩을 판매했던 프리우스 전문가인 업자에게 팔기로 했습니다.  마침 제가 사는 곳에서 4시간 30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스컨신 주에 살고 있었고 제가 알아본 폐차장에서 제시한 가격중에 제일 높은 가격을 자기가 그대로 준다고 하여서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리 하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자신의 픽업 트럭 뒤에 프리우스를 달고 갈 견인장비를 장착하고 와서 처음으로 얼굴을 보며 인사를 하였고 그래도 비교적 기분 좋게 보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저의 프리우스를 가장 잘 활용할 사람이기도 했고 그동안 저에게 정말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 그에 대한 저의 선의이기도 했습니다 (남아있는 배터리 팩 27개만 낱개씩 팔아도.. ^^).

 

나중에 이 차를 가져간 후에 이 친구가 배터리를 분해하고 저에게 배터리가 터진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잘 보이실지 모르겠지만 세로로 촘촘하게 배터리 팩들이 배열되어 있고 그 중 중간 우측에 시커멓게 배터리 팩 하나가 3분의 2가 날라간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 배터리 팩들은 상당히 견고한 금속 케이스로 덮여있어서 어디로 튀거나 누가 다치거나 하는 일이 없었던게 천만 다행입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차량에서 그렇게 경고했건만 좀 안다고 자만했던 저의 교만함과 신속히 교체를 하지 않았던 저의 게으름이 합쳐져서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지요.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저와 같은 일을 겪지 않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지금은 떠나버린 저의 프리우스를 고장 안나기로 소문난 그래서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결정한 혼다 어코드가 대체를 하고 있음을 추가로 알려드립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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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들이라면 혹시 기억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렸을 적 꿈을 이루겠다고 늦은 나이에 미국에 유학을 와서 40대 중반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탓에 모아둔 돈도 딱히 없는데다가 그동안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지원하느라 넉넉하지 않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대학을 졸업한 아들 녀석에게 새 차를 한대 사주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차를 마련해 주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아내가 '당신은 대학을 졸업하는 4학년 때 아버지가 사주신 자신의 차가 있었는데 당신도 똑같이 아들 녀석에게 최소한 차 한대 정도는 도와주어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에 마땅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는데다가 '이제 아들도 자기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 우리가 도와줄 일도 없어서 특별히 더 이상 지원해 줄 일도 없는데 마지막 선물로 차 한대는 마련해 주자' 라고까지 얘기하는 탓에 그냥 그러자고 했습니다.  아내에게 순종하는 삶이 행복한 겁니다. 암요.. 흑흑흑.. ㅠ.ㅠ


모든 일에 깊숙히 관여하시는 한국에 계시는 저의 아버지(아들 녀석의 할아버지)는 현대 차를 사주라고 권유를 하셨지만 그래도 아들 녀석이 가지고 싶어하는 차를 사주는게 낫겠다 싶어 그가 원하는 차로 결정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고장 안 나기로 유명한 만년 베스트 셀러 혼다의 Civic (시빅).


얼마전에 깜짝 놀랄 사고(이 역시 조만간 자세히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로 새 차를 갑자기 마련하면서 이미 이 동네 딜러에게 저 놈 독한 놈이다 소리를 들은지라 이번 가격 흥정은 좀 쉽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가격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참고로 저번에 저에게 차를 판 딜러는 아내에게 '니 남편 정말 두손 두발 다 든 지독한 협상가야 (He is a heck of a negotiator)' 라고 얘기한 것은 개인적으로 최근에 들은 최고의 칭찬으로 삼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데이타와 관련된 일이라 나름 월급루팡 노릇을 하면서 미국의 각 유명한 자동차 포럼에서 실제 아들이 원하는 차를 구매한 가격들을 모조리 수집해서 모은 후에 목표 가격을 정하고 딜러들과 소위 말하는 네고에 들어갔습니다.  반경 200 킬로 이내의 딜러 중에 가격이 가장 좋은 곳 4곳을 선정해서 이메일로 흥정에 들어갔습니다.  지난번 구입한 딜러에 가서 또 살 예정인지라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되겠지만 그들에게 최소한 다른데에서는 이렇게 준다는 정확한 근거를 보여줘야 되었기에 이 작업은 필수적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의 딜러는 규모가 작은지라 엄청나게 큰 딜러에서 제시하는 가격을 처음부터 제시하지 않는 탓에 이 과정을 해야만 합니다.  참고로 아들 녀석이 원하는 차를 저희 동네 딜러는 4대를 가지고 있고 대도시의 딜러는 무려 160대를 가지고 있더군요.  가격 차이가 상상이 되실 겁니다.


사실 저희 동네에서는 좋은 가격을 위해 대도시로 2-3시간을 운전해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저의 목표는 오로지 우리 동네에서 전국 최고의 가격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승부욕이 없는 아주 무르기 짝이 없는 게으른 중년 아저씨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는 당신 같은 승부욕은 본 적이 없다고 가끔 얘기를 하곤 해서 반신반의 했었는데 딜러들과 마지막 20 만원을 더 쳐내기 위해 이메일로, 전화로, 또 얼굴을 맞대고 안되는 영어로 논쟁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 어쩌면 아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어쨌거나 지루하고 나름 피를 말리는 흥정 끝에 원하는 가격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딜러와 직접 대면을 하고 결국 그 위의 매니저를 끌어드리고 (딜러 선에서 협상이 끝나면 제가 진 겁니다 ^^) 매니저와의 담판을 위해 이 동네 딜러와 제일 라이벌인 40분 거리에 있는 대형 딜러의 가격을 운운해 가면서 심리 작전까지 하면서 이루어낸 쾌거입니다.  참고로 딜러나 매니저나 이 분야에 도가 튼 사람들이라 절대 대화를 길게 가져가면 안됩니다. ^^  심지어 이 동네 사람이 딴 데 가서 사면 되겠느냐 이 동네 지역 발전에도 기여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뭔 기차 바퀴 펑크나는 소리냐, 나 이기적인 사람이다. 30만원 깍아주면 3시간 거리도 간다" 라고 되치기까지 했습니다. ^^


정말 피곤합니다. 이 흥정 과정이... 하지만 미국 최고의 가격을 이 조그마한 시골 딜러에게서 만들어 냈을 때의 쾌감은 정말 대단합니다. ^^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 (그러나 업무에서는 별 존재감이 없는 저를 돌이켜 보면 일을 좀 이렇게 근성있게 하지 라는 반성도 들긴 합니다 ㅠ.ㅠ)


흥정이 되면 오거라 연락해 두었던 아들을 전화로 부르고 (아들과 공동명의라 아들이 있어야 매매가 성립하기도 하지만 니네가 좋은 가격을 안주면 살 생각이 없다는 심리전으로 아들을 일부러 집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 흥정이 끝나고 나서야 차를 처음 둘러보는데 (차를 보지도 않고 흥정부터 시작했습니다 ^^)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아들 녀석에게는 제일 낮은 옵션인 깡통차가 당연히 제격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단계 위의 옵션이 크게 가격 차이가 안나는데 옵션 차이가 어마어마한 겁니다.  구경이 훨씬 큰 타이어에 스포티한 알루미늄 휠, 그리고 전동 선루프에 스마트 키에 원격 시동에 결정타로 요즘 제가 폭 빠져있는 자동차의 최고 혁신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애플 카플레이/안드로이드 오토 동시 지원까지... 이건 정말 한 옵션 낮은 것을 사주는게 바보같은 상황이 되버린 겁니다.


내가 탈 것도 아니고 아들 줄건데 첫 차는 검소하게 시작해야지 암 하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있었는데 마음이 흔들려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평소에 차량 옵션은 제일 낮은 것만 선택하자는 아내조차도 이건 정말 너무 차이가 난다 하는 바람에 가격을 다 결정해 놓고 한 옵션을 높은 것을 보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매니저가 한 옵션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좋은 가격 (이 역시 미국 최고 싼 가격 ^^)을 제시한 것을 다시 그 자리에서 6 만원을 깍았음에도 매니저가 예상치 않게 수용을 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한 옵션을 높여버렸습니다 (6만원 안 깍아줬으면 도로 옵션을 낮추려고 했었거든요 ^^).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아들 녀석이 한 없이 부러워졌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델에 자기가 원하는 색, 거기다가 온갖 화려한 옵션...  요즘 나오는 차는 스마트 키의 버튼을 두번 누르면 차 유리창 4개와 선루프가 동시에 일제히 내려가서 뜨거워진 차를 빨리 환기시킬 수 있는 기능도 있더군요.  인생의 첫 차를 이렇게 좋은 차로 시작하다니... 그리고 이 모든 차 가격은 제가 연이율 3.34%로 융자를 받았기에 제가 고스란히 4년을 갚아야 하는 빚이 되어 버렸지만 말입니다.  짜식... 나도 이런 아버지 진짜 두고 싶다, 이 녀석아!!



6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아들이 한번에 오는 대중교통이 없어 갈아타느라 총 10-12 시간 걸려서 오거나 4시간 정도 걸려서 시카고로 오면 우리 부부가 픽업하러 가는 일은 더 이상 없어도 되겠습니다만 당장 자동차 보험부터 일년에 85만원이 올라버리니 출혈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난 첫 차가 중고차였다구!! 이 녀석 차는 이게 뭐야!!" 하고 볼멘 소리를 아내에게 해대니 "그 시대에 차를 모는 대학 갓 졸업한 사람이 몇명이냐 있었냐고??  같은 상황에서 비교를 해야지!!" 라고 반격하는 아내에게 더 이상 찍 소리도 못했습니다.


정작 이 세상에서 젤 무뚝뚝한 아들 녀석에게는 'Thanks!' 한마디 들은게 전부 다이지만 원래 이 녀석이 그런 녀석이라 속으로는 엄청 감사하겠지 하고 혼자 자위하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정말 애비 노릇 하기 힘듭니다.  바로 차량을 보험에 등록하고 집까지 차를 몰고 온 아들 녀석에게 차키를 받아서 딸 아이랑 함께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나가면서 슬쩍 제가 차를 몰아보니 눈물나게 좋습니다.  요즘 차는 왜 이리 멋지게 나오는 겁니까!  ㅠ.ㅠ


졸지에 엄청난 선물을 받은 아들을 한없이 부러워 하는 속좁은 아버지가 되어버렸습니다만 가족 여행 가본 적도 거의 없이 고등학교까지 자기 방도 갖지 못하고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한 삶 속에서 조용히 숨죽여 살아야 했던 아들 녀석에게 제대로 된 첫번째 선물을 줄 수 있는 형편이라는게 (비록 빚으로 남아있지만) 감사하기도 합니다.


원래 이렇게 길게 쓰려고 했던게 아닌게 제가 그렇습니다. ^^  짜식 진짜 좋겠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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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4년) 7월인가에 제가 타고 있는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Toyota 의 Prius (이하 프리우스) 의 실제 엔진이나 다름없는 모터를 구동하는 배터리를 교체하는 대공사를 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똑같은 작업을 했던 내용입니다.  글을 읽어보시면 앞으로 몇번을 더 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예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모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을 보강하긴 했지만 여기서는 간략한 글 정도로 하구요, 자세한 수리 내용을 시간을 잡아 총정리 하려고 계획을 잡긴 했습니다. ^^  혹시라도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질문 남겨주시면 성심성의껏 답해드리겠습니다.  주인장이 좀 게을러서 답변이 늦을 수도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

참고로 요즘 제 블로그 글들이 통채로 복사되어 옮겨지는 사례가 있는데 이 글은 http://myusalife.tistory.com/101 이 원본이며 '샴페인'이라는 필명으로 쓰여진 두개의 커뮤니티외에 다른 곳에서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저의 동의없이 옮겨진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제가 프리우스를 처음 산 2007년만 해도 한국에서는 낯선 차종이었는데 이제 한국에도 프리우스 자동차가 들어가서 자동차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이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낯설지 않으시겠지만 실제로 프리우스를 구동하는 동력 배터리 (휘발유 엔진을 시동하기 위한 12볼트 보조 배터리 말구요) 는 어떻게 생겼는지 못보신 분도 궁금하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저는 2세대 프리우스를 앞서 말씀드린대로 2007년에 새차로 사서 현재 8년 7개월째 타고 있구요, 그동안 26만 킬로미터를 탔습니다. ^^

 

참고로 프리우스의 엔진 구동용 배터리 안에는 6셀짜리 배터리 팩이 28개가 들어있구요 이 중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구동이 안됩니다 (경고가 나오고 배터리 도움없이 차를 구동해야 함으로 배터리 문제를 안고 계속 주행시 차에 문제가 생깁니다).  작년 7월 22만 4천 킬로를 타고 배터리 중 한개가 문제가 생겨서 갈고 이제 1년 후에 25만 6천킬로를 타고 또 한번 문제가 생겨서 두번째를 갈았다가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서 지저분한 핸드폰 사진이지만 한번 올려봅니다. 

 



 

위의 첫번째 사진은 이번 수리중에 찍은 거고 저렇게 금속커버로 씌여진게 통차로 되어 있는게 배터리인데 무게가 거의 50kg 가까이 되고 도요타에 수리를 맡기면 저걸 통채로 교체합니다.  교체 비용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400만원 정도 듭니다.



 

두번째 사진은 작년에 찍어두었던 사진인데 금속커버를 벗겨내고 문제의 배터리 팩을 교체하고 밸런싱 작업을 하려고 제가 링과 와이어를 연결해서 자가 제작한 하네스로 모든 + 단자와 - 단자를 병렬로 연결해서 28개의 배터리 팩의 전압을 균일하게 맞추어 주는 작업을 했습니다.  56개나 되는 단자를 하나씩 일일이 손으로 연결하다 보니 + 와 - 단자가 닫는 일이 생겨 불꽃이 튀고 난리가 나기도 했습니다. ^^ 각 배터리 팩은 7.8 볼트 정도 되고 직렬 연결이라 무려 220 볼트 가까운 전압이 나옵니다.



 

세번째 사진은 조금 근접해서 찍어본 것입니다. 언제 시간이 나면 교체과정을 모두 기록하겠다고 약속드린 적이 있는데 나이가 드니 게을러져서 통 안되네요.  저 선 하나 하나 볼트에 연결되는 링 하나 하나 제가 다 직접 만들었습니다.  시간 많이 걸립니다. 흑흑.. 잠시 눈물 좀 닦구요.  그래도 작년에 만들어둬서 올해 잘 썼습니다.



 

네번째 사진은 처음에 분해를 시작할 때 찍은 것인데요, 이 사진을 보시면 프리우스 배터리의 위치와 크기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저기 은색으로 보이는게 배터리이고 뒷좌석 의자랑 모든 것을 다 들어내야 합니다.  물론 사이드 몰딩 이런 것도 다 뜯어야 하고 기본적으로 앞 운전석과 옆자리 의자 두개 빼고 그 뒤로는 다 뜯어내야 합니다.

 

핸드폰으로 찍은 좀 지저분한 사진이지만 (개인 정비 기록을 위해 찍은 겁니다)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프리우스 혹은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좋겠네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수리의 전과정을 한번 꼼꼼히 기록해볼 계획입니다.  인터넷에 프리우스 관련 수리 정보가 참 많은데 한글로 된게 거의 없다시피 해서 말입니다.


참고로 현재 프리우스 배터리 전체 가격은 $2800 (300만원) 정도 하구요 (내부에 28개의 배터리 팩이 들어있는 것을 새거로 도요다에서구입할 경우) 배터리 팩을 별개로 구입하면 새거를 구입할 수는 없구요, 중고로 구입해야 하는데 저는 한개당 $50 정도 준 것 같습니다.  eBay 등에서 더 싸게 구입할 수는 있지만 믿을만한 업자에게 구입하느라 돈좀 썼습니다. ^^  작년에 두개를 사놓아서 이번에는 새로 구입할 것 없이 편하게 했네요.  작년에 스페어로 남아서 이번에 쓴 배터리는 일년이 지났는데도 전압이 별로 떨어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더라구요.


앞으로 더 이상 교체할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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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니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휴가를 많이 갑니다.  특히 한국인 동료들은 한국으로 떠나는 분들이 많고 가까이 지내는 동료 박사님은 일본을 거쳐서 한국을 들어가게 되었다고 해서 일본길이 초행인지라 그래도 오래전이지만 일본을 다녀본 저와 여기저기 함께 일정을 짜보기도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거의 모든 동료들이 일년에 한번씩은 멕시코 캔쿤이 되었거나 하와이가 되었거나 옐로스톤 국립공원이나 나이아가라 등 각양 각지로 여행을 가는 듯 합니다.  하지만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힘든 14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40대 중반에 회사에 첫 취직을 하고 보니 큰 아이가 대학을 곧 가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계속 여유가 없어 가족들과 제대로 된 여행을 떠나본지가 언제인가 싶습니다.  덕분에 저희 아이들은 일년에 3개월의 여름방학, 일주일의 추수감사절 휴가, 그리고 연말 3주 정도의 겨울방학을 언제나 집에서 딩굴 딩굴 런닝맨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며 보내는 것에 매우 익숙합니다. 물론 3-5년에 한번쯤 다른 주에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하는 것 정도가 우리 가족 수준의 여행이라면 여행일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아내나 아이들이나 단 한번의 불만도 없으니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아빠가 꼭 멋진대로 여행을 한번은 데려갈테니 나라에 상관없이 가고 싶은 곳을 한번 말해 보라 하니 축구선수를 했었고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 녀석은 바르셀로나 정도를 꼽을 줄 알았고 학교에서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는 딸아이는 삿포로쯤 가고 싶을 거라고 예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아이의 잎에서 나온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똑같이 디즈니 랜드였습니다.

각각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이들에게 다 커서 그런데를 가보고 싶냐 라고 물어보니 가본 적이 없어서 다 컸음에도 불구하고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이니 잠깐 가슴이 시큰하기도 합니다 (사실 두 아이는 아주 어렸을 때 가본 적이 있는데 전혀 기억을 못합니다. ^^).

그 후 동네도서관에서 디즈니 랜드를 더 잘 즐기는 법이라는 책까지 빌려보면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 갈 수 있을지 사실 요원하기만 합니다.  저는 저 나이때 아버지 덕분에 참 가본 곳이 많았었는데 말입니다.

이곳 미국에 와서 나의 인생의 첫번째 꿈을 이루었으니 나머지 생의 두번째 소원으로는 온 가족이 정말 그럴듯한 곳으로 여행을 가는 꿈을 현재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날이 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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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보면 담배도 평생 핀 적이 없지, 술도 지난 20년간 마신 술이 맥주 한 2병, 와인 약간이니 술도 거의 안먹었다고 해도 되고 커피도 전혀 안 마시고 생활도 규칙적이고 더구나 매일 저녁은 아내가 정성을 다해서 준비해 줘서 영양상으로도 문제가 없고 일찍 귀가해서 자고 싶은 시간에 자니 누구보다도 건강해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콜레스테롤 문제와 갑상선 기능 저하증으로 매일 약을 복용하고 있고 폐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아 겨울이면 만성 기침에 시달리는데다가 요즘은 오십견까지 와서 고생중입니다.   더구나 체중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거의 20파운드 이상이 늘었구요..

그래서 아내의 권유로 조금씩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저희 국민학교 (네, 저는 국민학교 세대입니다 ^^) 다닐때 조회시간에 하던 국민체조입니다.  인터넷에 쓸만한 동영상이 있어서 매일 저녁 국민체조 세트를 6번 반복하는데 그게 딱 15분이 걸립니다 (동영상 아래에 첨부합니다). 



응접실의 TV 에서 흘러오는 1970년대와 달라진게 없는 국민체조 음악과 구령에 맞추어서 아내와 둘이 낑낑대는 것을 남이 보면 정말 웃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고등학생 딸아이가 이걸 보고 "뭐야~~~" 하고 놀래더니만 어느새 딸까지 합세해서 매일 저녁 9시 30분이면 세가족이 응접실에서 국민체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대학 간 아들은 다른 곳에 살아서 함께 못하지만... ^^).  그래도 운동이랍시고 몸이 개운해짐을 느낍니다.

국민체조를 하면서 느끼는게 이 세상의 일은 다 이유와 목적이 있고 어른들 말씀은 틀린게 없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이 국민체조를 우습게 생각하고 마지 못해 했었었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으며 전문가들이 몸의 구석구석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얼마나 연구했을까 생각해보면 이 하잘 것 없는 운동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이 됩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예전에 몰랐던, 뒤늦게 깨우치게 되는 것이 참 많음을 새삼 느낍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가치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게 되는 일을 겪게 될까요?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할 듯 합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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