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몇가지 개인적인 일로 영 블로깅을 등한시 하다가 생존신고 목적으로 예전에 써둔 글이지만 올려봅니다. ^^;;  지금이야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는게 그렇게까지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니지만 (이 글을 쓴 이후에 제가 일했었던 건물에서도 노벨상이 한명 나왔었거든요) 글을 쓸 당시만 해도 제게는 굉장히 흥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의 추억을 저도 잠시 떠올리며 시간이 한참 지난 글이지만 약간 각색을 해서 올립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겪는 큰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제가 만났던 소위 유명인이라면 아무래도 연예계나 스포츠쪽이 많았는데 제가 참여했던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학회에서 만났던 유명인은 색다르게도 노벨상 수상자들이었습니다. 그중 석사나 박사 학위 전혀 없이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노벨상을 받아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일본의 다나까 고이찌씨를 직접 만난 얘기를 짧게 적어 보려고 합니다. 

당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학회를 떠나기 몇달전부터 저의 관심은 제가 발표할 포스터 (학회에서는 자기가 한 연구를 포스터로 만들어 붙여놓고 그 앞에 서서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과 답변을 하는데 이를 포스터라고 그냥 부릅니다) 가 아닌 이 학회에 참석하게 될 전년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 다나까 고이찌였습니다. 이번 학회에는 다나까 고이찌 외에도 함께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버지니어 커먼웰쓰 대학의 죤 펜도 참가하여 기념 강연도 할 예정이었으나 저의 관심은 다나까에게 훨씬 더 쏠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그의 전력이 이채로웠고 이 글을 쓰기 몇달전에 KBS 에서 방영한 일본 NHK 에서 제작한 그에 관한 특별 다큐멘터리를 본 탓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큰 학회이다 보니 과연 그를 개인적으로 대면할 찬스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마음 한편에서는 그를 꼭 만나고야 말리라 하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 

몬트리얼에는 토요일날 도착을 했고 월요일부터 학회의 정식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를 어깨너머나마 보려면 이틀이나 기다렸어야 했지만 의외로 그를 볼 수 있는 첫번째 찬스는 빨리 찾아왔습니다. 바로 도착 당일 토요일 저녁에 다나까 고이찌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인 시마즈(Shimadzu) 제작소에서 주최하는 만찬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찌기 이 행사에 등록을 해놓았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물론 시마즈의 간판 스타인 다나까가 참석하리라는 기대도 할 수 있었구요. 하지만 낯선 도시이자 첫번째 온 몬트리올의 첫날밤을 리셉션장에 딱딱하게 앉아 있기가 왠지 싫었습니다. 그래서 시마즈에서 주최하는 리셉션 대신 같이 간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몬트리얼의 다운타운으로 나갔습니다. 왠지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가 그에 대한 기대보다 더 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결국 길거리에서 수많은 유럽풍의 미녀를 보면서 이 선택에 아주 만족했었고 이날 저녁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여성들보다 더 아름다웠던 분들에 대한 이국에서의 추억은 직접 만나서 들려드릴 안주거리로 남겨놓겠습니다. ^^).

tanaka그의 연구소에서 - 다나까 고이찌



다음날 아침 일찍 만난, 전날 시마즈 리셉션에 참석했던 두명의 연구실 동료들로부터 다나까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두명의 미국 여성 동료들은 그에 대해 매우 언짢아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나까가 짧게 강연을 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하도 사진을 찍어대자 그는 연설을 무려 4-5번씩이나 도중에 중단하면서 "나는 유명 연예인이 아닙니다 (I am not a rock star)" 를 거푸 강조하였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동료들에게는 연설을 중단하면서 그렇게 내보였던 반응들이 짜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내심 그를 직접 만나게 되면 이런 얘기를 해줘야겠구나 라는 말도 안되는 건방진 생각을 당시에는 했었습니다.  ^^

그를 드디어 대면하게 된 것은 바로 학회 첫날 월요일이었습니다. 혼자 이리 저리 발표된 다른 연구원들의 포스터들을 보러 우왕 좌왕 돌아 다니다가 바로 옆에 3명의 회사 동료와 함께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다나까 고이찌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찬스를 그냥 흘려보낼 사람이 아닙니다. ^^  그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다가서서 인사를 했습니다.  첫인사는 일부러 일본어로 했습니다.  그래봐야 "곤니찌와, 다나까상" 이지만 말입니다. ^^ 

의외로 차분하게 그는 자연스럽게 저의 접근을 받아주었고 그 이후로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왔다 갔다 했지만 의외로 저와 다나까 고이찌의 대화는 별로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한국에서 왔고 미국에서 관련분야의 공부를 하고 있다고 소개를 했더니 바로 다나까 고이찌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한국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허걱... 곧바로 저는 어떻게 한국말을 아냐고 여쭈어 보았고 그는 이깟 외국어 한 문장 외우는게 뭐가 어렵겠냐는 대답을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그의 대답에 잠시 멍하긴 했지만 노벨상 수상자로부터 듣는 한국 인사는 솔직히 조금 각별했다는게 당시의 저의 느낌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한류 이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던 때이고 한국말을 한마디라도 아는 일본인을 학회에서 만나기란 코엑스에서 제시카 알바를 만나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곧바로 정중하게 사진 촬영을 요청했으나 역시 예상했던 대로 정중하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사실 말투는 정중하긴 했으나 일본 사람들이 부정을 표시할 때 완곡한 표현을 쓰는 반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또렷한 No 였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 사람들은 좀체로 No 라고 직접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 나왔던 베스트셀러중의 하나가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인" 이라는 책이겠습니까?). 

조금 구차한 변명을 하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너를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고 내가 웹페이지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너의 사진을 올림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inspiration (영감, 동기부여) 가 될 수 있다고 완곡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거듭 No 라는 그의 손사래를 봐야만 했습니다.  일순간 굉장히 미안해지더군요.  그는 이어서 작년 10월만 되어도 사진 촬영에 응했었겠지만 (작년 10월에 노벨상 수상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다, 미안하다라고 얘기를 하더군요. 일견 얼마나 많은 사진 세례에 시달렸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에 과감히 그와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더 이상 괴롭히는 것도 예의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그 순간 제가 한국 사람을 대표하고 있는데 매너있게 행동하는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옆에 있던 시마즈 회사 동료들도 미안하지만 사진은 안된다 라고 거들어 주어서 제가 바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게 미안했던지 다나까 고이찌는 윗주머니에서 자기의 명함을 꺼내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성의를 표시하는 다나까 고이찌가 그 순간 고맙더군요. 무례해서 그렇게 사진요청을 거절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실갱이 아닌 실갱이가 오간 후에는 편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좀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된 당신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고 했더니 그가 그건 NHK 에서 제작된 걸거다해서 제가 맞다고 맞장구를 쳤고 한국의 학생들이 많이 동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니 꼭 한번 한국을 방문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주십사하고 부탁도 했습니다.  바로 직전에 제가 물어본 한국에 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가 없다고 했었거든요.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이미 약간의 지식을 가진 듯 해서 자기 회사 시마즈 제작소의 한국 지사가 '동일'이라는 것을 저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와 저와의 대화는 계속해서 영어로 진행이 되었고 그의 영어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5년 이상을 시마즈 연구소에서 지냈었던 경력 탓에 의사 소통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던지는 그의 인상은 다큐멘터리에서 강조되었다시피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엔지니어였습니다. 그의 옷차림, 머리 및 모든 스타일 역시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엔지니어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날 오후에 있었던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는 깔끔하게 단정한 머리와 신사복을 입고 나와 다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가 입었던 신사복이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아 (나중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시 확인을 했음^^) 저의 미소를 자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잠시 그의 노벨상 수상자 초청 강연 얘기를 하자면 제가 참석한 학회가 규모가 커서 그의 강연장에는 3-4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한 듯 했습니다. 그렇게 큰 강연장을 처음 보았고 (대형 스크린이 가로로 8개나 설치될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 안에서 펼쳐진 그의 강연은 주로 그 역시 노벨상을 받아서 무척 당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의 동료들의 공로 치하 그리고 그가 한 일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바로 전년도 노벨상 수상자인데다가 학위없이 노벨상을 받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지라 그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었습니다.



nobel_prize노벨상 수상 직후 그의 아내와



저는 첫만남에서 서서 그와 불과 10분 혹은 15분 정도 얘기를 나누었을까요, 이렇게 짧은 시간의 대화 후에 정중히 인사를 하고 제가 자리를 뜨는 것으로 그와의 첫만남은 마감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왠지 그를 오래 괴롭히기는 싫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는 43살에 노벨상을 받았고 그가 노벨상을 받은 업적은 그가 27살에 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실험중에 우연히 오염된 용매가 아까와 오염된 용매를 이용하여 실험을 하는 바람에 그 결과로서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고 그 발견이 단백질 분석의 중요 역할을 하는 기기의 원리가 되는 바람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노벨상을 받기 전에는 일본 국내 학회에서 우수 논문상을 단 한차례 수상한 것이 그의 수상 경력의 전부다이다고 할만큼 평범한 연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노벨상 수상이 전세계에 더욱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고 하는 것을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습니다. 

그가 선물한 명함과 그의 회사 동료의 명함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재 시마즈 제작소 측에서 '다나까 고이찌 기념 질량분석 연구소" 를 만들어 주어 총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함에는 단순히 "질량분석 연구소 소장" 이라고만 씌여있습니다. 물론 그 연구소에 근무하는 동료들의 명함에는 모두 '다나까 고이찌 기념 질량분석 연구소" 라고 쓰여 있었으며 명함 뒷면의 영문 표기 역시 다나까 고이찌의 것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명함에만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 이름이 일어로도 영어로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다나까 고이찌의 일면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 다나까 고이치의 명함>



< 회사 동료의 명함. 연구소 이름 앞에 '다나까고이치 기념'이 붙어있음>


그 후 학회기간 내내 이곳 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다나까 고이찌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학회장 한가운데 마련된 휴식용 테이블에 우연히 다시 나란히 앉게 되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이때는 다나까 고이찌가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어서 끼어들지는 못하고 인사만 나누었습니다.  이때도 느낌이 참 평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벨상 수상자들은 제가 본 TV 나 사진에서의 혹은 이번에 온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자인 죤 펜 교수처럼 나이가 많았고 모두 항상 신사복을 입고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다나까 고이찌는 일본에서 학위 없이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고 역대 노벨상 수상자중에 두번째로 젊다는 군요). 

우습지만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노벨상 수상을 꿈꾸어 왔던 저에게 한자리에서 두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직접 볼 수 있었던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학회는 저의 기억속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TV 에서나 볼 수 있었던 평민(?) 노벨상 수상자 다나까 고이찌와의 짧은 만남 역시 저에게 동기 부여가 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니까요.

아무쪼록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학벌이나 기타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하는 사람이 꼭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제가 외국에 나와서 지켜보니 한국인 연구자들의 노력이나 역량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는 것을 절감하고 있기에 빠른 시일내에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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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최민식씨와 하정우씨가 주연하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 개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이 영화의 감독이신 윤종빈 감독님과의 일화가 하나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봅니다.  제가 사는 곳이 한국도 아닌데다가 규모가 매우 작은 미국의 도시이다보니 이곳에서 한국의 영화감독을 본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곳에서 한국의 영화감독님을 두분이나 만나뵙는 행운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윤종빈 감독님 말고 다른 분은 정말 거물급이시니 다른 발제글로 뵙겠습니다. ^^;;




미국에 사는 한인이지만 늘상 마음속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박혀있습니다.  외국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요? 기회만 닿으면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하는 일에 별로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말이야 거창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래봐야 에전에 소개드렸던 아이들 학교에 가서 한국에 대한 특강을 한다거나 한국과 관련된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그 정도 수준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이곳에는 한국에 대하여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활동하는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비영리단체가 있습니다.  한국 문화원 (Korean Cultural Center) 이라고 현재는 일리노이 주립대학 교수이시고 설립당시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셨던 정선희 교수님께서 의욕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단체입니다.  여러가지 인연으로 한때 이곳에 소속되어 이름만 걸어놓은 고문 중의 한 사람으로 지낸적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제가 했던 일의 하나가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한국 영화 상영회에서 상영할 영화를 추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에 들리시는 분들 중에서도 영화에 관한한  전문가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저같은 경우 그져 남들보다 조금 한국영화를 많이 보고 별것 아닌 것도 아주 특별하게 주절 주절 떠들어대는 편이라서 이런 의뢰가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제 취향이 철저히 대중적인지라 제가 추천해 드리는 영화는 비교적 주변분들에게 재밌었다는 얘기를 듣곤 했었기에 계속 추천을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곳 대학 학과와 단체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한국 문화원이 연합해서 제가 있는 도시의 예술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을 통채로 빌려서 한국 영화제 (Korean Film Festival) 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멀티플렉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대로 된 영화관이었던지라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행사가 되었고 하루 종일 몇편의 영화를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연달아 상영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원래 제가 있는 이 동네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평론가인 Roger Ebert 의 고향인지라 Ebert 가 직접 주최하는 Eberfest 라고 하는 영화제가 매년 개최되는 생각보다 영화에 관한한 수준이 높은 도시입니다.  Ebertfest 의 경우 처음에는 Ebert's Overlooked Film Festival 이라고 하여 세상이 잘 모르는 이 평론가에 생각하는 우수한 영화들을 골라 하던 영화제였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멋진 이름을 가지는 영화제가 되었습니다 (저의 딸은 이 평론가와 유치원 동문입니다 ^^).


[ Virginia 극장에서 열리는 Ebertfest 영화축제]

어쨌거나 이 한국 영화제는 예상을 넘는 큰 성황을 이루었고 주변 도시의 한국영화팬들까지 와서 좌석이 완전히 차고 넘치는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날 일이 있어서 막상 본 영화제에는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초청작으로 상영된 영화중의 하나가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 였고 다른 미주 지역의 순회 강연까지 함께 계획이 되어 윤 감독님은 초청 게스트로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윤감독님과의 질문/답변 세션이 '용서받지 못한 자' 영화 상영후에 이어졌고 참석하신 분들 말로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고 미국의 관객들은 먼곳에서 날아온 한국 감독에게 많은 감사를 표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사정 때문에 일체의 행사에 참석하지 못해 댓발처럼 입이 나와있던 저에게 한국문화원 회장님의 윤감독님과의 뒷풀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전화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저녁 10시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한걸음에 달려나간 맥주집에는 지난번 '한국 영화를 위해 1인 시위를 한 미국 교수' 라는 글에 소개한 적이 있는 Robert Cagle 교수 및 한국인 자원봉사자들 8분 정도가 자리를 지키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날 윤 감독님에 대한 첫 인상은 '전도가 유망한 신인감독'이라기보다는 소탈해 외모에 눈빛이 반짝거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청년 정도의 이미지였습니다. ^^  이미 저는 윤 감독님이 저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행여나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선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해 할까봐 일부러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던 기억도 나네요.

당시 윤 감독님은 미국 방문이 처음이었기에 저희들에게 미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여쭈어 보았던 기억도 나고 이런 저런 한국 영화의 위상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들도 많이 오고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동안 궁금해 했던 영화 작업 현장에 관한 질문들을 좀 던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일 늦게까지 문을 여는 bar 였음에도 새벽 2시가 되자 업소도 문을 닫아야 해서 다들 아쉬운 마음으로 일어났다가 헤어지지 못하고 길거리에 서서 마지막까지 얘기하던 저를 포함한 두명의 사람들에게 자기 숙소로 가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윤 감독님이었습니다.  저희들이야 당연히 "콜~~~~~~~~" 을 외쳤고 윤 감독님의 숙소는 일반 호텔이 아닌 Queen Anne Style 이라고 불리우는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일반 주택이었다가 방문객 숙소로 개조된 이곳에서는 나름 유명한 Lindley House 라는 곳이었습니다.


[Lindley House]

이 곳은 이곳 학교 출신인 이안 감독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의 바로 그 감독) 이 이곳을 방문했을때 숙소로 사용할만큼 VIP 들이 올 때 즐겨 숙소로 이용되는 곳인데 주최측에서 이곳을 잡아준 듯 하였습니다.  저도 말로만 들었지 방문은 처음이었는데 매우 우아한 분위기에 자기 집 같은 아늑한 느낌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편안한 장소로 옮긴 네명은 정말 아주 즐겁게 수다를 떨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또 조합이 여성 2명, 남성 2명의 밤새며 이야기하기 좋은 구성이어서 그랬는지 좀 더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함께 했던 이곳에 사는 저를 포함한 3명이 폭소를 터트린건 윤 감독님이 자신의 커다란 여행가방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여행시 많이 가지고 다닌다는 고추참치, 짜장참치 등 각양각색의 참치캔들과 사발면을 위시한 각종 라면이 본인 짐보다 더 많이 들어있어서였습니다.  윤 감독님의 말씀으로는 미국에는 이런게 별로 없다고 하여 넉넉히 싸가지고 왔다고 하셨는데 저희 동네에는 한국에 있는 식료품과 간식들을 거의 대부분 구할 수 있는 한국 마켓이 3개나 있는지라 여기서도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머나먼 미국까지 이고 지고 왔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희가 있는 일리노이 주뿐만 아니라 인근 인디애나주와 위스컨신주까지 초청을 받아서 가야하는 일정이고 방문할 곳들 역시 참치캔과 라면이 차고 넘치는 곳들이라 저희는 의기투합해서 윤 감독님의 짐을 덜어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가미가 된 참치들은 그냥 뜯어먹고 그냥 참치캔은 함께 소중하게 가져오신 김치까지 털어내서 금요일 심야 새벽 3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참치와 라면사리를 집어넣은 참치 김치찌게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정말 맛있게 윤 감독님의 짐을 덜어드린 후에는 동이 틀때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이야기는 그때 '비스티 보이즈' 영화를 기획하고 있던 터라 그 영화 기획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윤계상씨와 하정우씨의 캐스팅에 관한 대화 등을 많이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 윤 감독님과는 아쉬운 작별을 해야했고 미국 일정을 다 마칠 즈음 관계자를 통해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저희 동네에 있었던 만큼 재미있었던 일이 없어서 아쉽다 하시면서 결국 저희 동네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카고에 한번 더 들려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그 후에 저는 목빠지게 기다리던 '비스티 보이즈'를 누구보다도 반가운 마음에 보았었고 그 날 저녁에 함께 찍었었던 사진들을 윤 감독님의 싸이에 올려드려었던 기억도 납니다.

이렇게 먼곳까지 오셔서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미국의 팬들에게 좋은 시간을 가지게 해주신 것 감사드리고 그때 '용서받지 못한 자'들을 보았던 미국의 한국영화 팬들은 분명 '범죄와의 전쟁'도 특별한 마음으로 감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미국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말입니다.

그때가 2006년이었으니 한류라고는 미국에 발도 딛지 못했을 때이지만 이렇게 한국 분들이 여러분들이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한국의 영화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많은 노력을 이미 다방면으로 기울이고 계셨었다는 것 하나는 여러분들이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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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계시는 분들은 미국 생활이 어찌 보이실지 모르겠지만 저와 같이 나이가 들어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한국인들의 경우 사실 이곳에 와서도 매우 한국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삽니다.  먹는 것도 한국 음식에 가족끼리는 한국말로 얘기할 뿐 아니라 어쩌나 친목을 위해 만나는 사람들도 거의 한국사람들이며 미국 자국 뉴스보다도 한국의 뉴스에 훨씬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물론 '난 한국사람과 교류하지 않을거야' 라고 결심을 하고 한국분과의 관계를 단절하신 분들도 계시고 한국인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은 동네에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이를 제외하면 이런 한국적인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계시는 분들이 예상하시는 것처럼 미국 친구들과 폭넓은 관계와 정을 나누고 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친구 못지 않은 미국 친구를 사귈 기회가 드물지만 있으며 오늘은 저의 절친과 저의 동네에 살았던 국민가수로 불리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아무쪼록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이 글이 검색에 의해서 알려지는 글보다는 저의 블로그에 들리시는 분들에게 편안히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인지라 이 유명인의 실명은 등장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물론 실명을 쓰지 않아도 제 블로그에서 여러번 언급한 분이시라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인 두명중의 한명인 Cynthia (이하 신시아라고 하겠습니다) 를 만난 것은 저희 아이가 다니고 있던 학교 주차장에서였습니다.  어느날 차를 세우고 학교에 들어가는데 아주 정겨운 목소리로 누군가 헬로를 하길래 돌아보니 아주 교육을 잘 받고 자란 느낌이 물씬 나는 풍채좋은 흑인 아주머니께서 저희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다짜고짜 반갑다고 인사를 하면서 자기가 한국 친구들이 좀 있다고 하면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면서 이야기를 거는데 그 인상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환한 웃음으로 받았습니다.  알고보니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첫째는 우리아이와 같은 학년, 둘째 아이는 저의 딸아이와 같은 학년이었습니다.  한 학년에 반이 두반 밖에 없는 학교라 거의 같은 반일 확률이 높지만 그때는 아마 첫째가 같은 반이고 둘째는 다른 반이었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친다고 하길래 초등학교나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에 어찌나 붙임성있게 행동을 하시던지 친한 미국 가정 없는 저희 가족에게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특히 양쪽집 큰 아들끼리 절친이 되는 바람에 둘도 없이 친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흑인으로서 받는 불평등을 겪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으로 미국에 산다는 것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 주었고 미국에 살아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흑인들의 정서가 한국 사람들과 잘 맞는 덕분에 얘기를 할 때마다 참 말이 잘 통하는 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나서 한참 지나고 나서야 이 분이 뭐하는 사람인줄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에 비하여서는 개인적으로 뭘하는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를 자세히 물어보지 않는게 어느 정도 관행인지라 음악을 가르친다는 것 정도 이외에 더 꼬치꼬치 질문을 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대 인간으로만 만난 것이지요.

조금 친해지고 집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것이 신시아가 초중고 음악선생이 아니라 제가 있는 도시의 주립대학교 음대 성악과 교수라는 것이었습니다.  남편 역시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신 바 있는 줄리어드 출신의 음대 성악과 교수이고 이 대학교 전체 합창단 (Glee) 지휘자이자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것두요.  하지만 원체 대학교수들이 많은 도시인지라 '아 그렇구나' 라고 넘어가고 말았을 터인데 그녀가 매년 여름이면 유럽투어를 다니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베를린 필, 정명훈 등등과 함께 일을 했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우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덕분에 유명 성악가들에 얽힌 뒷얘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그녀가 조수미를 칭찬하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우쭐했었습니다.  또 함께 컨서트를 했던 무대 뒤에서 밥 딜런을 몰라보고 벌였던 해프닝은 지금도 만날 때마다 낄낄대며 이야기하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궁금해 하실 분을 위해 이 글 끝에 첨부했습니다 ^^).

이 분들을 알고 나서 가장 큰 혜택을 받았던 것 중 기억나는 것 하나는 저 혼자 관객이었던 어느 재즈 잼(즉홍연주)에 초대 받았을 때 였습니다.  어느날 신시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샴페인, 우리 집으로 지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빨리 와라' 라는 내용에 가족도 아닌 저 혼자를 부른 것을 의아해 하면서 그 집 지하에 도착했더니 그곳에는 소규모의 재즈 컨서트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남편이 트럼펫 연주자와 드럼, 기타, 베이스 연주자들을 불러서 즉홍적으로 재즈 음악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신시아가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줄 아는지라 저를 급하게 불렀고 저는 난생처음 저 혼자 관객인, 저를 위한(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 컨서트에 참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족히 70은 되어보이는 영화에서 나올듯한 작은 체구에 머리가 하얗게 샌 흑인 트럼펫 연주자와 젊지만 천재적인 느낌의 드러머, 중년의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 그리고 쥴리어드 출신의 교수가 연주하는 재즈 피아노가 어우러진 잼 세션은 정말 환상이었습니다.  레퍼토리도 없이 누군가 하나 적당한 코드로 시작을 하면 곧 다른 연주자들이 치고나와 합주를 하는데 거의 1시간 30분이 넘게 펼쳐진 이 지하실의 컨서트를 저는 정말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제 생애 가장 감동적인 컨서트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때 왜 캠코더를 가지고 가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지금도 땅을 치고 후회할만한 그런 엄청난 잼이었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몇가지 혜택이 더 있었군요.  하룻밤에 노래 두곡 정도 부르는데 당시 개런티가 만불(천만원)이 넘었던 신시아를 뉴욕에 있는 에이전트 (유명 성악가들은 거의 다 에이전시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몰래 제가 다니던 교회의 소규모 무대에 세웠던 일입니다.  당시 손바닥만한 교회의 음악행사에 왔던 오십명이나 될까 했던 미국인 관객들은 세계적인 성악가의 노래에 완전히 압도되어 돌아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노개런티로 출연을 해줬습니다 (무대 의상도 따로 준비해서 입고 왔고 데리고 온 반주자는 본인이 따로 저몰래 사례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신시아를 성악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만들어 준 오페라가 바로 죠지 거쉰의 작품인 포기와 베스 (Porgy and Bess) 에서의 베스역인데요, 이 오페라 중 Summertime 같은 노래는 클래식 음악을 전혀 모르시는 분이라도 한번 들어보았을만큼 유명한 곡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래가 조금 끈적인다 하는 여성 가수들은 거의 모두 이 노래를 한번씩 불렀었습니다. 심지어 재니스 조플린도요). 

그녀가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유명한 Simon Rattle 경과 함께 한 포기와 베스 DVD 는 아직도 대표적인 포기와 베스 공연으로 팔리고 있는데요, 저는 제가 귀한 선물을 드려야할 분들 중에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 계시면 아마존에서 이 DVD 를 주문한 후 신시아의 집에 달려가서 선물 받을 분의 이름이 들어간 싸인을 받아서 주곤 했습니다. 

이 DVD 에는 지금의 남편도 함께 공연을 해서 (그 때는 처녀/총각일 때이고 이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기억이 가물 가물.. ^^) 두 사람의 싸인을 받아다가 이름을 넣어서 선물을 하면 받는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곤 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저에게 불평 한번 없이 싸인기계가 되어 준 신시아에게 감사를.. ^^;;

[포기와 베스 DVD. 사진속의 여인이 신시아 ^^]

어쨌든 두 집 자녀들간의 친분, 그리고 감히 평생을 음악을 해온 세계적인 성악가 부부들 앞에서 알량한 음악 이야기를 겁도 없이 해대는 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고 저의 아내가 만든 한국 음식을 정말 좋아해 주던 신시아 덕에 두 가족의 친분은 더욱 깊어만 갔고 지금도 제가 가장 친한 가족으로 신시아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지금 이사온 집도 신시아가 자기가 거래하던 좋은 부동산 중계업자를 소개해 주는 바람에 얻게 되어 이들에게 더욱 감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두 가족이 함께 이사를 해서 곧 맞 집들이를 할 계획입니다 ^^).

아, 섭섭한 일도 한번 있었습니다. ^^  신시아의 남편 제자가 팻 메쓰니 밴드 (예, 그 기타리스트 팻 메쓰니 맞습니다 ^^) 에서 베이스를 치고 있어서 이들이 저희 동네에서 매년 벌어지는 기타 축제에 게스트 연주자로 왔을 때 신시아의 남편이 저를 이 행사의 뒷풀이에 초대하기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야 뭐 항상 죄수복 스타일의 티셔츠를 즐겨입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요, 결과는 남편분이 정신이 없어 저를 부르는 것을 잊어먹는 바람에 지금도 두고 두고 제가 만날때마다 우려먹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그 와중에 "너 나 때문에 미안하지? 한번 도와줘" 해서 남편분도 제 교회 음악 행사에 올렸습니다만.. ^^;;

평소 제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항상 잘 들어주던 이 부부와 어느날 이런 저런 잡담을 하다가 우연히 제가 사는 도시에 와서 살고 있던 소위 한국의 전설적인 가수 한명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조그만 동네에 한국에서 셀린 디온과 머라이어 캐리를 다 합쳐놓은 정도의 지명도와 실력을 가진 전설적인 가수가 와서 살고 있다고 침을 튀겨대니 이 부부가 관심을 가지더군요.  그렇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 이렇게요.

그렇게 신시아 부부와 한국에서 와서 살고 있다는 가히 국민가수라고 할 수 있는 A 씨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고 난 후 제가 할 일은 어떻게 일면식도 없는 A 씨와 연락을 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비고 강단에서 많은 성악가를 키워낸 부부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와의 만남은 여러모로 참 유익한 만남이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알고 지내던 젊은 처자가 당시 A 씨가 다니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한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A 님은 이곳에서 주로 직업을 위한 2년제 학위를 운영하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 연수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는데 저의 이런 뜻을 그 후배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돌아온 답은 아쉽게도 "아직은..."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그 대답도 이해가 가는 것이 당시가 한국에서 온 직후였었고 뭐랄까 주변의 수업을 함께 듣는 분들에게는 격의 없는 사이이긴 했어도 대체로 일반 한국인들과의 접촉은 A 님께서 좀 피하던 그런 시기였었습니다.

그렇게 그 일은 묻혀졌고 저도 뭐 제 앞가림 하느라고 (당시 학위과정중이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 일이 생각난 것은 제가 우연히 A 씨의 부군을 개인적으로 알게되고 A 씨의 집도 방문하고 저녁도 함께 먹고 제법 안면을 튼 후였습니다.  예전에 한번 거절을 당했던 일이라 조심스럽게 한번 만나보시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A 님 본인에게 다시 한번 거절을 당할 것을 감안하고 여쭈어 보았는데 놀랍게도 대답은 아주 적극적인 예스였습니다.  심지어 A 님 본인은 예전에 그런 제안을 받았던 것조차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A 님은 이곳에서 학교로 진학해서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약속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얘기를 꺼낸지 바로 다다음날인가 토요일에 신시아의 집에서 함께 만나보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A 님 부부를 모시고 가기로 하였고 아직 영어에 익숙치 못한 A 님을 위하여 통역을 해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제 차로 가기로 하여 A 님 댁에 들려서 두분이 나오기를 응접실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순간이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한 겨울이어서 창밖으로는 눈꽃이 덮혀있는 나무 몇그루가 서있던 다소 스산했던 풍경이었었습니다.

우두커니 서있던 제 옆으로 먼저 내려와서 함께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봐주던 분이 A 님인 것을 발견하고 나름 뻘쭘하더군요.  언제나 A 님은 부군과 함께 뵈었었고 TV 에서 뵙는 모습과는 다르게 좀처럼 말이 없으시고 무뚝뚝한 편이며 나름 한 카리스마 하는지라 저도 모르게 '선생님' 소리가 나오는 그런 분이어서 (저와 나이차가 겨우 두살밖에 안나는데도) 옆에 서있는 A 님의 존재감이 느껴져서 살짝 움찔했었습니다. 

함께 서서 전면이 유리로 된 문을 통해서 밖을 바라보며 서있던 조용한 적막을 먼저 깬 것은 A 님이었습니다.

A : 전 고드름이 참 좋아요.
샴페인 : 아.... 녜.... (녜???????????)

먼저 말씀을 건네리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반응은 '아.... 녜....' 였었지만 속마음은 정말 화들짝, 물음표 11개 정도 되었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뭐 몇년전에 이 타운에 엄청난 추위가 몰아쳐서 전 도시의 나무들이 얼음에 뒤덮혔는데 참 아름다웠다, 혹시 사진을 원하시면 보여드리겠다 이런 그다지 영양가없는 대화였지만 A 님의 대답은 그 사진이 보고 싶다였고 결국 나중에 이메일로 사진들을 보내드렸었습니다. 어쨌거나 언제나 제가 대화를 꺼내고 묻던 입장에서 먼저 질문을 받고 보니 뭐랄까 한걸음 가까워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잠시 후 부군되시는 분도 준비가 되셨는지 이층에서 내려오시고 해서 두분을 제 차에 태워서 신시아의 집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A 님의 집이 저희 집과 가까운데다가 신시아의 집 역시 무척 가까운 탓이었습니다 (녜, 제가 좀 좋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삽니다. ^^).

언제나 그렇듯이 신시아는 저를 보자마자 격한 포옹으로 반겨주었습니다.  신시아는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타입이어서 만날 때마다 격렬하게 안아주곤 했었는데 스킨쉽에 항상 조심하는 편인 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포옹은 언제나 진심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A 님 부부와도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서 바로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 (조금 작은 그랜드 피아노)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응접실 안쪽에 편안한 소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아노 옆으로 자리 잡은 것은 처음부터 음악적인 교감을 나누고 싶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제가 따로 뭐 레슨이나 그런 것을 부탁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작부터 분위기는 레슨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나서 (뭐, 얘기 많이 들었다, 샴페인에게 듣기에 정말 유명한 가수라고 들었다, 영광이다 뭐 이런류의 인사들요) 다소 딱딱해 보이는 목재 의자에 신시아와 A 님이 마주보고 않았고 저는 그 중간에 두분을 바라보며 앉게 되었습니다.  A 님의 부군은 좀 떨어진 조금은 편안한 소파에 앉으셨고 신시아의 남편은 피아노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누가봐도 레슨을 위한 분위기였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리 배치였습니다.  먼저 신시아는 (당연히 그렇겠지만) A 님의 노래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A 님께서 조금은 망설이시지 않을까 하는 것은 저의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별다른 목푸는 과정없이 바로 앞에 앉아있는 A 님에게서 터져 나온 노래는 바로 왕의 남자의 주제곡 '인연'이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가수들의 노래를 실제로 가까이에서 들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최고라고 여기는 양희은씨부터 김광석씨, 이승철씨, 임재범씨, 들국화, 인순이 등등부터 Kathleen Battle 등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그리고 제가 있는 곳의 주립대의 박사과정 성악가들의 수도없는 발표회까지 비교적 좋은 소리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또한 어머니께서 성악을 하신 터에 어렸을 때부터 소위 노래좀 한다는 사람들의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눈앞에서 터져나온 A 님의 노래는 바로 "헉.. 이것은 전설... 아니 레전드야"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끔 만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좁지않은 신시아 집의 응접실의 공기가 단 한톨도 남기지 않고 A 님의 소리로 빼곡히 채워지는 그런 실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압도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정도 거리에서 프로 가수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는 탓이기도 했겠지만 이 날 응접실 공기의 밀도는 평소의 몇배이상 두터웠을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

잠시 여기는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잊고 사정없이 노래에 몰입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노래입니까, '인연'이라는 노래는...

의외로 노래를 듣고 있는 신시아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저게 바로 수많은 성악가들을 가르쳐 온 관록인가 싶었습니다.  얼마나 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뽕 맞은 것처럼 취해있었으니까요.  노래가 끝나고 나자 신시아는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경이롭다라고 표현을 하더군요.  하긴 그동안 제가 봐온 성악가들은 대체로 몸집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실제로 성악하시는 분도 '통'이 좋아야 한다고 표현을 하시더라구요.

그 후부터는 정말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A 님이 대한민국에 계셨다면 누가 감히 A 님을 레슨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는 미국 ^^  분위기는 완전한 레슨이었습니다.  신시아는 이리저리로 다양하게 소리를 내어 보라고 시켰고 A 님은 정말 지극히 온순한 학위가 걸려있는 대학원생마냥 신시아가 요구하는대로 여러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이에 끼어서 정말 아무도 들어보지 못했을 A 님의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감상하는 횡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시아는 가수로서 A 님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개인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고 A 님은 정말 그 자존감 높은 모습에서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았을 여러가지 고충에 대해서도 만난지 몇십분도 되지 않은 신시아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제 눈앞에서는 건국 이래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한국 가수와 전세계의 오페라 무대를 누빈 그야말로 일류 성악가 두사람의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멋진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장르가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시아는 A 씨의 고충에 지극히 많은 공감을 했고 나름대로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또 대부분의 대화는 '너 이런 문제 있지 않니?' '맞아 맞아' 이런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의식을 느끼기에 충분한 교감들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이들이 나는 이야기들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A 님의 이야기인지라 이곳에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릴 수는 없겠지만 오랫동안 정상을 달려온 한 국민가수의 여러가지 개인적인 고충은 저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고 신시아의 여러 답변과 조언에 역시 A 님도 깊은 공감을 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잠시 제가 통역을 하고 있는지 토크쇼의 관객역할인지 헛갈리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A 님은 자신의 음악에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고 팬들 속에 오래 오래 그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남고 싶어하는 진지하고 성찰이 깊은 음악가임에는 분명했습니다.

신시아는 A 님의 몸 여기저기를 주무르면서 발성에 관한 여러가지 노하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제 앞에서 A 님의 하복부를, 등을, 허리를 눌러가며 여기 저기 지적해 주고 어깨를 쥐어 돌려가며 그야말로 주물럭 주물럭 (^^) 자세와 발성법을 교정해 주던 모습은 아마도 제가 평생 다시 못 뵐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A 님은 신시아의 요구대로 이렇게 저렇게 소리를 다양하게 내어보기도 했고 너무나도 예의바른 학생으로 순간 돌아가 계셨습니다.  이전에 나름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들이 신시아의 조언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모습을 보면서 살짝 기뻐하시기도 했습니다.  요즘 인기를 끌고있는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엄마 미소를 지어보이며 멘토로서 자상하지만 때로는 근엄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을 TV 로 지켜볼때마다 가끔 이때가 연상이 되어서 혼자 미소를 짓곤 합니다 (두 모습이 참 다릅니다 ^^).

신시아 남편은 충실한 피아노 반주자로서 이런 저런 짧은 소절의 멜로디 반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만나자마자 인사도 오래 나누지 않고 바로 레슨 모드로 들어가서 격렬한 시간을 보내던 분위기를 일순간에 확 깬 사람은 의외로 저의 아내였습니다.  다른 일로 아내가 잠깐 신시아의 집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한번 인사를 나누었다고는 하나 갑자기 낯선 방문객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실내 분위기는 일시에 쨍하고 얼어붙어버렸습니다.  마침 눈치가 빠르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내는 전해줄 물건만 놓고 (물론 그 짧은 와중에도 신시아는 뛰쳐나가서 아내에게 격렬한 포옹을 선사했지만요) 얼른 가버렸습니다.

금방 분위기를 회복하고 다시 가열찬 레슨 모드로 돌아갔습니다.  뭐랄까 반은 이런 저런 발성에 관한 기교 이야기, 나머지 반은 서로의 가수로서의 고충을 얘기하는 대략 그런 분위기로 흘러갔습니다.  또 가수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고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신시아는 58년 개띠입니다. 한국 나이로 54세죠).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하기도 하고 경험을 나누는 그 모습은 실로 보기 좋았습니다.  저에게는 언제나 그야말로 이빨을 까는 걸로만 만났었던 신시아의 진짜 성악과 교수로서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은 첨 보는 듯하여 매우 이채로웠으며 이로 인해 신시아에 대한 존경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신시아의 남편이 짧은 멜로디를 연주를 했습니다.  저도 알고 있는 익숙한 멜로디였고 (아쉽게도 어떤 곡이었는지는 현재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저도 모르게 잠시후에 흘러나올 A 님의 멋진 소리를 기대하며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A : ....................
샴페인 : ?

A : ....................
샴페인 : ???

당연히 A 님께서 그 멜로디에 맞추어서 짧은 소절을 노래해 주시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A : ..................

A : 제가 이 곡을 몰라요.

샴페인 : 아....... 녜........

잠깐 신시아의 남편은 한국어로 나눈 우리 대화를 알아들었는지 (그럴리가 ^^) 연주를 중단했습니다.  이어지는 A 님의 이야기는 자기가 곡을 쓰는데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노래를 잘 듣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곡이 많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만 덧붙여 주신 이야기는 전혀 모르던 예상치 못한 얘기였습니다.

A : 고등학교때까지는 그래도 음악을 들었는데 그것도 다 하드락 음악이었어요.

전.....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저에게는 국민가수로만 알고 있었던 A 님이 음악적으로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저야말로 하드락 매니아, 메탈 키드라고 불리우던 고딩 시절을 보낸 사람이고 동시대에 A 님도 레드 제플린, 딥 퍼플들과 같은 밴드에 함께 열광했었다고 생각하니 그져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신시아의 남편은 얼른 눈치를 채고 다른 멜로디를 연주를 하고 먼저 소리를 내어주어 가이드를 해주었고 그렇게 다시 감히 대한민국 일등가수에게 행해지는 레슨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교감을 나누고 레슨이 마무리 되간다 싶어 시계를 보니 무려 4시간이나 흘러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시간이 흐른지도 모르고 알량한 실력으로 두분의 대화를 열심히 통역을 했었는데요 사실 어느 시간이 흐른 후부터는 뭐 저의 통역이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야말로 두 대가는 음악으로 대화를 나누었으니까요.

적당히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는 A 님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습니다.  정말 얻어야할 인생의 해답을 얻은 구도자의 느낌 딱 그것이었습니다.  몇번을 만나도 미소짓거나 환하게 웃는 표정을 별로 본 일이 없었는데 이 날도 환한 미소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제 느낌에도 바로 알 수 있을만한 그런 환희가 A 님에게서 느껴졌었습니다.

이 날 레슨을 받은 날이 토요일이고 원래 계획은 일요일날 시카고로 올라가서 월요일날 한국으로 귀국을 해서 당시 탁재훈이 출연하던 '불후의 명곡' 스케쥴이 잡혀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A 님은 스케쥴을 변경하여 일요일날도 다시 신시아를 만나기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일정을 바꿀만큼 소중하게 여기셨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일요일은 제가 참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미 두 분은 저의 통역이 필요가 없었고 A 님에게 좀 더 허심탄회한 음악적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A 님의 부군을 통하여 들은 얘기는 일요일날의 만남도 너무나 유익했었고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면서도 꼭 다시 와서 신시아를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만난 두 대가의 얘기는...  지금도 그때의 분위기가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저는 대한민국 일등 가수의 노래를 코 앞에서 4시간이나 듣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고 A 님은 아마도 한국에서는 가져보지 못하셨던 귀한 시간을 가졌으리라고 혼자 막연하게 상상을 해봅니다.

저의 오지랍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또 하나의 멋진 인간관계를 형성해 드린 것 같아 아직도 보람이 있습니다. 지금도 신시아를 만나면 A 님 이야기를 종종 물어보시고 전 너무나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A 님 소식을 전해드리며 뿌듯해 했습니다.  아마도 두분이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날 두분을 차에 태워 다시 집에 내려드리면서 저는 A 님의 차고 한 구석에 버려져 있는 데스크탑 컴퓨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데스크탑에 얽힌 국민가수의 잃어버릴뻔 했던 소중한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이곳에 '기억에 남는 데이터 복구 하나 (링크)' 라는 글로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이 글과 과거의 저 글을 읽으신 분들은 왜 제가 가수 A 님이 한국에 돌아가셔서도 저에게 일부러 새로 발매한 앨범에 싸인을 해서 미국에 보내주시고 정말 비싼 일식 저녁 한끼를 약속하셨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전례없이 길고 장황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아울러 이 이야기가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A 님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래 봅니다. 


P.S. : 제가 좋아하는 신시아의 퍼포먼스 동영상 하나를 첨부해 봅니다.  화질은 정말 구리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목소리로 연주한 그녀의 노래만큼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영어로 된 이 영상의 설명을 읽어보시면 정명훈 (런던 심포니 시절)이라던지 요요마 , 존 윌리암스, 쿠르트 마주르 (이스라엘 필), 사이먼 래틀 (베를린 필) 등 세계적인 분들과 함께 한 그녀의 위상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노래가 마음에 드신다면 유튜브에서 Cynthia Haymon 으로 검색해 보시면 제법 많은 수의 그녀의 퍼포먼스를 보실 수 있습니다.   Summertime 도 기회가 되면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P.S. 2 : 본문 중에 소개한 밥딜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 그대로 재구성 하나 해드립니다.  그녀가 무슨 자선 컨서트 참석을 했었는데 무대뒤에서 왠 후즐근하게 생긴 남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괄호안은 제가 첨가한 겁니다. ^^

신시아 : 넌 이름이 뭐니? (거의 양희은 톤)

밥 딜런 : (밥 딜런 특유의 느린 분위기로) 음............... 바아압...........

신시아 : 음.....

신시아 : 넌 뭐하고 사니?

밥 딜런 : 음............... 노래해.........

신시아 : 음.... 그렇구나....

신시아 : 그럼 열심히 해...... (-.-;;)


그녀의 얘기로는 정말 후즐근해 보여서 노래로 밥은 먹고 살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고....ㅋㅋㅋ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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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또 어느 영화인이 요절하였는가 놀라셨을 분도 계시겠지만 글 머리에 '회고'라고 썼듯이 지금부터 들려드리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제가 잘 아는 영화인의 이야기입니다.  문득 그 분 생각이 나서 이전에 메모해 두었던 글을 보고 그리움에 몇자 적어보는 글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글이지만 제 이야기를 항상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듯이 저는 영화, 그것도 한국영화의 대단한 팬입니다. 아마도 제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더욱 더 한국영화에 대한 애착이 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야말로 초등학교 시절) 부터 대단히 많은 수의 잡지를 보고 자랐는데 제가 태어나서 처음 보게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잡지도 영화 잡지였습니다 (그전에 보던 잡지들은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 이런 초등학생들을 위한 잡지였습니다).  

제가 최초로 본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는 바로 일본에서 발행하는 "스크린" 과 "로드쇼" 라는 영화 잡지였는데 당시에는 이 잡지를 지금은 사라진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뒤의 중국 대사관 근처의 외국 간행물 파는 서점에서만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서점들은 제가 가장 마지막에 한국을 갔을 때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지방에 살던 저는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을 올라와 고속 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한시간 정도를 가야만 이 잡지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가 1977-78년이니 정말 까마득한 옛날이군요.  초등학교 5-6학년 때였으니..  

덕분에 이 잡지를 읽으려고 일본어 중 가타카나를 공부하기도 했었으니 좋은 영향이 되기도 했군요 (두 잡지 모두 외국 영화에 대해 더 비중있게 다루어서 일본어로 외국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를 알아야지만 외국 배우 이름이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에는 한국어로 된 영화 잡지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지만요 (제 기억에 이때 발행된 한국 영화 잡지 이름도 스크린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먹어 결혼을 하고 직장 때문에 수원에 살게 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는 교회 모임을 통하여 재야(?)의 영화 감독 한분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충무로식 표현으로 하자면 아직 입봉(주: 첫 개봉극장 상영용 영화를 만들어 데뷰하는 것) 을 못한 감독이었습니다.  영화 아카데미 출신에다가 동기들이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막 뜨기 시작한 분이셨으나 본인의 건강상의 이유로 입봉을 못하고 혼자 준비를 하던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특히 씨나리오를 직접 쓰는 분으로서 많은 작품들에 관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시놉시스(주: 대략의 영화 줄거리들만 기술한 짧은 스토리북) 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왕성하게 씨나리오 작업을 하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참새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듯이 영화에 관심 많은 제가 가만 있을리 있나요?  만나기만 하면 모임의 주제 이야기보다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이분의 새로운 씨나리오가 탈고 되면 제일 먼저 받아서 읽어 보고 관객의 입장에서 제 의견을 얘기해 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제가 더 많이 했던 작업은 이 분이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때마다 해결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분은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여관 옥상의 옥탑방에서 혼자 살고 계셨는데 씨나리오를 집필할 때에는 한글 워드 프로세서 아래아한글 1.52 버젼으로 작업을 하실 때였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안정적일 때가 아니어서 이런 저런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면 언제나 5-10분내로 달려가서 직접 해결을 해드리곤 했었습니다.  저를 만나기전까지는 줄을 바꿀때마다 엔터키를 누르시고 들여쓰기를 할때면 스페이스바를 눌러서 밀어쓰던 습관으로 인하여 대본 수정시마다 정렬에 애를 먹던 것을 Shift-Tab 을 이용한 들여쓰기 및 몇가지 팁으로 이분을 신세계로 인도해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야 제가 대한민국에서 아래아한글을 제일 잘 다룬다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모임인 한/글/사랑회의 회원으로 뽑힐만큼 HWP 를 심각하게 쓰던 시기라 그분에게 유용한 많은 팁을 전수해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즘 유행이라는 깔대기(잘난체? ^^) 한번 들이대 보았습니다).  

또 운영체제 문제 해결 및 컴퓨터 수리 10분 대기조로 활약하면서 컴퓨터 고치는데 10분, 영화 얘기 하는데 몇시간 이상을 떠들었던 기억이 새록 새록 납니다.  이 때 신혼이었던 아내는 전화를 받고 컴퓨터만 고치러 가면 돌아오지 않는 남편 덕에 아예 초저녁에 A/S 를 뛰러가면 혼자 일찍 잠을 청하기도 하였었습니다. ^^;;
 
그러다가 한번은 이 분이 만드시는 단편 영화에 참가하여 엑스트라로 출연하기까지 하는 재미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작비가 엄청 부족한 단편 영화의 경우 (대개 만드는 사람이 모든 비용을 부담) 어떨 때는 스텝과 배우의 경계가 모호하기도 했으며 제작 환경이 아주 열악해서 지하철에서 비가 내리는 창가에 앉아있는 주인공의 씬을 찍기 위해 연출부 역할을 하는 몇명이 1.5 리터 PET 병 서너개에 물을 넣어서 배우가 앉아있는 앞쪽 창문으로 가서 손을 밖으로 내밀고 페트병으로 물을 뿌리면서 비오는 효과를 내기도 하였었습니다.  

사전허가를 받지 못해 이러한 일들을 몰래 하기도 했었고 1분도 안되는 이 씬 (scene) 하나를 찍기 위해 수원-서울역간을 두번 왔다 갔다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때 알게된 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영화에 대한 센스가 엄청 뛰어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하철 칸에 있는 모든 일반 승객들이 영화를 찍는다고 영화를 찍는 카메라 쪽으로 부자연스럽게 쳐다보지 않고 지하철 승객처럼 다들 훌륭하게 각자 연기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  심지어 어떤 승객 분들은 감독의 컷 소리가 나고 나면 자기 연기가 부자연스럽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하셔서 저를 웃게 했습니다.  그 분은 카메라 앵글 반대편에 계셔서 영화에 나오실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  

그때 저는 주인공이 지하철안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옆에서 혀를 끌끌차면서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지하철 승객 1 역을 했었는데 주변에서 연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 다만 얼굴이 커서 화면이 꽉차는 대형 스타였다는 소리도 함께 들어야 했습니다만...
 
당시 이 분이 단편 영화를 찍었던 이유는 단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을 경우 자본 투자를 받아서 충무로에서 머리를 올릴 수 있는 챤스를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잘 아는 방송작가분들이 TV 드라마를 쓸 때 몇몇 장면에서 대사를 구성해 드린 경험 밖에 없는 저로서는 영화 제작 현장에 이렇게 직접 참여하는 일이나 대본을 미리 읽어 보고 검토하는 일은 무척 흥미롭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분은 신부전으로 인하여 일주일에 한번 내지 두번은 온 몸의 피를 걸러내는 신장 투석을 받으로 병원에 다니는 힘겨운 삶을 살고 계셨지만 항상 긍정적이고 밝으시며 왕성하게 영화 활동을 (비록 소규모 단편영화들이었지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장 문제로 까맣게 타버린 이 분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그 푸석푸석하던 피부도 이분의 아름다운 미소를 감추게 할 수는 없었거든요.  영화를 촬영하고 나면 함께 했던 모든 분들이 이 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에 모여서 소주에 김치 안주로 뒷풀이를 하는 광경들이 아직도 선합니다.
 
제가 미국에 온 이후에도 인연은 이어져서 이메일로 대본이 날라오면 제가 읽고 저의 의견을 다시 이메일로 보내고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대본 하나는 제대로 된 느낌으로 읽어보라고 항공 우편으로 보내 주기도도 하셨었습니다.  그 중 기뻤었던 하나는 그 분의 씨나리오가 문성근씨가 운영하는 영화사에서 주최하는 씨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그 분 감독하에 제작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씨나리오가 저에게 우편으로 보내준 그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있으셨던 걸까요? 이 후에 그 분께서는 주연으로 당시 인기가 있었던 여명과 김희선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메일을 보내와  저를 더욱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소식이 뜸해지고 저도 미국에서의 제 앞가림에 여념이 없어서 연락이 끊긴게 한 2년쯤 되었을까요?
 
2003년 어느날 인터넷 판 C 일보 기사에서 저의 눈을 잡아 끄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어느 젊은 영화인의 죽음" 이었습니다.  끝내 꿈을 피우지 못하고 삶을 접어 버린, 한 전도 유망한 실명을 밝히지 않은 젊은 영화 감독의 주목을 끌지 못한 죽음 이야기였습니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고 그 젊은 영화인의 사인이 신장 관련 질환이라는게 더욱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곧바로 기사 게시판에 답글을 올렸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혹시 돌아가신 그 젊은 영화인의 성이 '민'가가 아니냐구요. 하루 후에 게시판에 글을 작성한 기자로부터 다시 받은 답글은 '민'가가 맞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에이 그래도 민씨가 얼마나 많은데...  게시판에 그 분의 실명을 공개하기가 꺼려져서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누가 되는 질문입니까?) 기자의 개인 이메일로 돌아가신 그 분의 성함이 '민병관' 감독님이 맞느냐고 재차 여쭈었습니다.  이틀 정도가 지난 후에 돌아온 이메일은 안타깝게도 정확히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못다 핀 꽃 한송이'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습니다.  99년인가 씨네 21 영화 잡지에 컬러 특집 커버 기사로 '충무로의 그늘, 민병관' 이라는 전면 기사 (충무로에서 역량있는 젊은 감독이 얼마나 크기 힘들다는 것을 그 분의 예로 기획했던 특집 기사였습니다)가 나올 때만 해도 오히려 저는 이제 그 분이 피나보다 라고 희망을 가졌었고 씨나리오 대상을 받았을 때 이제 곧 히트 감독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장미빛 꿈을 꾸었었는데 말입니다 (그 특집의 일부기사는 씨네 21의 링크 가깝고도 먼 충무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이름을 확인 시켜 준 그 C 일보 객원 기자분의 글에는 민 감독님의 씨나리오가 그의 영화 아카데미 동기인 장현수 감독을 통해서 곧 영화화 될 것이라는 소식도 실려있었습니다.  다른 동기 감독들의 추모글을 통해 보니 민감독님이 영화 아카데미 시절 가장 주목 받았던 분 중의 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더군요.  결국 민 감독님은 돌아가신 후에 입봉 아닌 입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었던 씨나리오 "엔터" 가 바로 당시에 영화화 되기로 했던 작품입니다.  그 후에 그분의 씨나리오들이 어떻게 영화화 되었는지에 관한 정보는 현재 저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돌아가신 그 분의 이름 석자가 크레딧에 올라와 있는 작품이 존재하기를 간절하게 빌어봅니다.

오랫만에 검색을 통해 위의 씨네 21 링크에서 보게 된 고 민병관 감독님의 사진 때문에 이 저녁 제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고 울리는 군요.  당시 이 씨네 21 잡지를 한국에 부탁하여 받아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절친한 지인에게 꼭 이 감독님의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빌려주었더니 나중에 그냥 주간지인줄 알고 버렸다고 하여 제가 굉장히 속상했던 기억도 함께 나는 군요.  제가 평생 만나본 분들 중에 가장 착하고 겸손하고 예의가 있었던 사람 5분만 꼽으라면 그 중에 들어갈만큼 사람 좋고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정열적이셨던 바로 그 분 고 민병관 감독님을 오늘 추억해 봅니다.

언젠가 그의 이름이 담긴 영화 크레딧을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어느 한분이라도 보고 그분을 기억하게 되신다면 아마도 그게 제가 고 민병관 감독님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지나간 기사를 찾기 위해 '어느 젊은 영화인의 죽음' 으로 검색했을 때 등장했던 미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가신 또 다른 많은 젊은 영화인들을 이 순간 또한 기려 봅니다.

민 감독님, 보고 싶네요. 다시 뵙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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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 중에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문구를 들어보시거나 알고 계신 분들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위키피디아의 정의에 따르면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스톡홀름 증후군을 대표하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사건은 1974년의 언론재벌 허스트의 딸 유괴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 언론재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막대한 부를 소유한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이자 상속녀로서 남부러울게 없는 패티 허스트양이 급진 좌익 게릴라 단체인 공생해방군 (共生解放軍, Symbionese Liberation Army) 에 유괴된 후 2개월 후에 엉뚱하게도 그들의 일원으로서 샌프란시스코의 한 은행을 터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전세계에 충격을 안겨준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소년중앙' 이라는 어린이 잡지의 열렬한 독자였던 저는 한국의 한 지방 도청 소재지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전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언론재벌인 허스트는 지금도 그의 집이었던 허스트 캐슬이 관광지로 유명하고 (DP 회원님들 중 미국 여행을 다녀보신 분중에 분명히 그곳에 가보셨던 분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의 저택이 정문과 본체가 우편번호가 다르며 집안으로 기차가 다닌다는 전설이 열렬히 회자되던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부자 일가이기도 했었으니 이 충격은 정말 그 해에 일어난 해외토픽 중 가장 유명한 것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CC 카메라에 잡힌 패티 허스트의 총을 든 은행강도 모습 - 출처: 위키피디아]

 원래 공생해방군 단체가 패티 허스트를 유괴한 것은 그들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75년 4월에 벌어진 또 다른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시의 은행강도 사건에서는 민간인이 한명 사망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공생해방군이라는 단체는 FBI 의 엄청난 추적을 받게 됩니다.  패티 허스트는 이 사건에서 자기는 도주용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으며 그해 9월에 체포되어 수감되게 됩니다.  3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결국 79년에 지미 카터 대통령이 감형을 해줌으로써 79년에 석방이 되었고 2001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그의 임기중 마지막 일의 하나로서 그녀에게 사면을 해줌으로써 완전한 민간인으로써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그녀는 이 사건과 관련된 인터뷰를 한다든지 가끔 영화에 출연한다든지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허스트를 유괴하고 같이 은행강도를 했던 공생해방군의 일원중에 당시에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은 사람 중에 제임스 킬고어(James Kilgore) 라고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패티 허스트가 연관된 은행강도 사건들 (녜, 한번이 아닙니다) 이후에 이 사건에 가담된 대부분의 가담원들이 바로 체포가 되었으나 그만은 도주를 하여 2002년에 FBI 에 의하여 체포가 되기까지 무려 27년을 도망자로 지내게 됩니다.  

그가 체포된 곳은 바로 남아공 (South Africa) 의 케이프 타운.  아프리카로 건너가 짐바브웨등을 건쳐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대학에 일하면서 27년간을 FBI 의 추적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가 그의 집을 방문한 설문조사에 나선 현지 아프리카인으로 보이는 두명에게 '어떤 와인병 모양이 예쁘나 한번 쥐어봐라' 라는 권유에 따라 와인병을 만지게 되고 이에서 채취한 지문으로 신분을 확인한 FBI 요원들에게 바로 다음날 전격 체포되어 미국으로 압송되게 됩니다.  그가 잡힘으로 해서 당시 사건과 관련된 공생해방군의 모든 멤버가 체포되게 되어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됩니다.

제임스 킬고어[2002년 남아공에서 체포된 후 청문회를 나서는 제임스 킬고어 - 사진출처 : Reuters 2002]

그는 공생해방군과 함께했던 1975년의 새크라멘토 은행 강도 사건에서 가담원의 실수로 발포되어 목숨을 잃었던 민간인 한명에 대한 2급 살인죄로 6년, 불법 폭약 소지 및 공문서(여권) 위조로 4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 길었던 27년의 도망자로서의 삶속에서 그는 짐바브웨와 남아공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하여 공부하면서 지역 대학교등에서 강의를 하는 교육자와 행동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교도소 재소자의 교화 프로젝트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수화를 배우기도 하고 노조에서 일을 하기도 했으며 남아프리카의 교육정책 및 사회전반에 관한 활동에 깊숙히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는 처음 도망자가 되면서부터는 원래의 이름이 아닌 John Pape 라는 가명을 썼으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일찍 사망한 아이의 신원을 이용해서 위조여권과 신분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었다고) 아프리카에서 만난 미국인 박사 과정 학생과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 두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감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우린 모두 짐바브웨인인걸 (We Are All Zimbabweans Now)' 라는 책을 써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베를린 필름 영화제에서 '영화로 만들기에 제일 좋은 책 10권' 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27년간의 도망자 생활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6년반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가석방되는 사람들이 차는 팔찌를 팔목에 두른 채 2008년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은 먼 이국에서 꿈을 찾아 날아와서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중년의 한국 남자와 매주 한, 두번씩 자식들이 운동하고 있는 축구장에서 만나 그들의 자식이 만드는 골이 나올때마다 혹은 극적인 승리를 거둘때마다 함께 껴안고 기쁨에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의 지극히 평화로운 삶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권유로 좌익 단체에 가입하여 급진적인 일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들석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무려 27년을 가명으로 도망자의 몸으로 지구의 정반대쪽에서 아프리카인들을 가르치며 세상을 바꾸어 가는데 일조하던 그가 이제는 편안한 안식과 가족의 사랑을 만끽하며 몇년이 지나도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미국 중부의 소도시에서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의 인상을 처음 본 누구도 그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FBI 와 숨바꼭질을 하며 한때는 대부호의 손녀를 납치하고 은행 무장 강도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일주일에 한두번 얼굴을 마주하는 동방에서 날아온 소시민에게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최고의 친구이며 그들의 아들끼리는 축구라는 운동속에서 둘도 없는 소울 메이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월은 급진 좌파 행동가의 이력을 지닌 미국 사내에게도 그져 꿈을 쫒아 멀리 날아와서 무기력해 보이는 월급쟁이의 삶을 사는 한 아시아인에게도 그렇게 똑같이 드리워져만 갑니다.



후기:

제가 아들녀석의 축구팀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친구인 라니(Lonnie)의 아버지가 책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들 녀석이 라니와 친하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였습니다.  라니는 드물게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딴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대개 이럴 경우 이혼하고 재혼한 경우였으나 라니의 부모님은 이혼한 적이 없습니다) 라니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다는 점에서 좀 특이하구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가 책을 쓴 작가라는 것을 아들을 통해서 알게되었고 그로 인해 알게 된 내 친구 제임스의 이력은 매우 흥미로웠으며 그의 뒷이야기에 상당히 많이 매료가 되었었습니다.

내 친구 제임스는 제가 이 도시에 온지 16년동안 만난 미국 남성중에 가장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백인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월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제가 항상 제 직장 퇴근 시간보다 먼저 시작하는 아들 녀석의 축구 홈 경기에 늦게 가서 두리번 거리고 있으면 언제나 내 곁으로 먼저 와서 저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항상 제 얘기를 잘 들어주는 최고의 친구입니다.  그의 아내역시 백인의 아내로서는 드문 흑인이지만 남편 못지않게 따뜻한 사람이어서 언제나 아들녀석들의 축구 경기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 그라운드에서 함께 껴안고 펄쩍 펄쩍 뛰는 사람은 저와 제임스 그리고 제임스의 아내입니다.  심지어 제 아내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말이죠.

제임스는 제가 제임스의 과거를 알고 있는 줄 모릅니다.  또 저도 제임스에게 내색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하여 편안할지 어떨지 절대로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는 라니 아빠, 마이클 아빠로 만났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저는 그 티를 전혀 내지 않고 계속 갈 겁니다.  다만 그의 책을 사게 되는 날 그에게 싸인해달라고 하고 싶은 욕구를 어찌 숨길지가 걱정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그의 더 자세한 스토리를 알게되실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문에 의하면 제임스가 그의 책과 스토리를 현재 영화 극본으로 집필 중에 있으니까요.

이렇게 또 다른 극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제 친구 제임스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후기 2 :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27년을 추적하여 결국 범인(^^)을 검거하고 만 FBI 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영화는 어쩌면 FBI 쪽의 입장에서도 나올 수 있을 듯합니다.  ^^  마지막으로 제가 사는 도시에서 가장 축구를 잘한다고 하는 제임스의 아들 라니의 동영상 하나 첨부합니다.  우리 도시 및 인근 몇개 도시의 챔피언을 꼽는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아들 녀석의 학교는 라니의 결승골로 우승을 하게 됩니다.  이게 겨우 몇달 전 일이군요.  캠코더를 가져갔던 저는 용량이 부족하여 불과 10분 정도만 동영상을 찍었는데 우연히 그의 골장면을 담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경기 후 유튜브에 업로드하여 제임스에게 보여주니 정말 기뻐하고 좋아하더군요.  아래 비디오의 골장면 직후에 뒷모습만 보이지만 두손을 허공에 가로지르며 펄쩍 펄쩍 뛰면서 좋아하는 이가 바로 제임스입니다.  제가 비디오를 안찍었다면 저 자리에서 그와 부둥켜 안고 함께 뛰고 있었을 것입니다.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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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블로그에 방문해 주시는 분들 중 미국에 거주하시는 분들이라면 아마존 (Amazon) 을 모르는 분은 안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시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곳에서 판매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자서전이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초반에 많이 달리던 혹평에 가까운 도서 리뷰에 반하여 최근에 갑자기 호평에 가까운 리뷰들이 짧은 시간내에 많이 달리면서 조작 논란이 일어났던게 요지가 되겠습니다.  여기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라기보다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기에 이 기회에 제가 조금은 관련이 있는 아마존의 리뷰어 (reviewer) 시스템에 관해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 블로그의 오랜 방문객이라면 이미 예전에 관련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어서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번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

현재 미국에서 아마존이라고 하는 웹 싸이트는 더 이상 단순한 서점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모든 품목을 판매하는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온라인 쇼핑 싸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파는 물건 이외에도 아마존 마켓 플레이스라고 해서 개인 판매자들이 아마존 장터를 빌려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놓아서 그야말로 방대한 시장이 되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직접 팔지 않는 한국산 DVD 나 블루레이 디스크 같은 것도 이러한 방식으로 구입할 수 있고 중고물건까지 판매할 수 있게 되어있어 옥션과 같은 역할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이 무엇보다도 인기를 끄는 이유는 미국 어느 싸이트보다 빠른 배송 시스템과 좋은 가격에도 있지만 각 물건에 달리는 수없이 많은 양질의 리뷰 덕택입니다.  저도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언제나 각 해당제품의 전문 싸이트보다도 오히려 아마존에 가서 일반 소비자의 반응을 봅니다.  예를 들어 AV 기기의 경우 미국에는 Avsforum.com 이라는 매우 전문적이고 걸출한 싸이트가 있지만 결국 저의 구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곳은 아마존의 소비자 리뷰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들께서는 아마존에서 전문 리뷰어 집단을 운영하고 계신 것을 알고 계신지요.  한국으로 치자면 체험단이라고 할까요? 아마존에서는 상당한 수의 자체 리뷰어들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이 새로 나오는 물건에 우선적으로 리뷰를 달고 이를 이용하여 판매를 증진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 리뷰어 중의 한 사람이라서 이 프로그램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

아마존에서는 이 전문 리뷰어 프로그램을 Vine Program 이라고 하는데 한국말로 하면 넝쿨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 속한 사람을 저희들끼리 Viner 라고 부릅니다.  이 프로그램에 속한 사람들은 일반인이 부러워할만한 혜택을 하나 받는데요, 그건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리뷰한 상품을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달에 보통 4개까지 고를 수 있는데요, 가끔씩 특별하게 5개나 6개까지 고를 수 있기도 합니다.

리뷰어들에게는 매달 두번 리뷰용 상품을 고를 수 있는 목록이 나갑니다.  세번째 주 목요일과 네번째 주 목요일 이렇게 두번 목록이 제공이 되고 리뷰어들은 자기가 리뷰하고 싶은 상품을 골라서 리뷰를 하게 됩니다.  첫번째 목록과 두번째 목록은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세번째 목요일에 나오는 첫번째 목록은 각자의 리뷰어가 담당하는 분야에 관한 품목 위주로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전자제품 (Electronics) 리뷰어인데요, 제가 받는 첫번째 목록에는 전자제품 위주로 담겨있습니다.  책을 전문으로 하는 리뷰어들에게는 책들이 주로 담겨있습니다.  요지는 첫번째 목록은 리뷰어마다 다른 제품들이 담긴 목록이 나간다는 겁니다.  네번째 목요일에 나오는 두번째 목록은 첫번째 목록에서 남은 물건들이 모두 모아서 나갑니다.  즉 모든 리뷰어들이 같은 목록을 공유하게 되며 이때는 책이나 생활용품을 담당하는 리뷰어들이 전자제품이나 다른 상품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아마존 안에는 오로지 이 Vine Program 에 가입된 리뷰어들만 접근할 수 있는 포럼이 있는데요, 여기서는 매달 첫번째 목록이 나가고 난 후에는 '나는 뭐가 목록에 올라왔는데 뭐를 골랐다' 라고 하는 정보를 나누느라 매우 뜨겁습니다.  이곳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적용이 되어서 책이나 생활용품을 리뷰하는 분들은 저와 같이 전자제품을 리뷰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부러워합니다.  아시다시피 책을 리뷰하는 분들의 경우 가격이 비싸지 않은데다가 책 한권 리뷰하려면 다 읽어야하기 때문에 시간도 만만치 않게 소모되거든요.  또 생활용품을 리뷰하는 분들의 경우 "난 남자인데 생리대가 나왔어... 제길.." 하는 웃지못할 탄식도 가끔씩 올라옵니다.

그럼 모든 리뷰어들에게 공통적으로 모든 종류의 제품이 제공되는 두번째 목록에서 다들 공평하게 혜택을 보면 되지 않느냐 생각하시겠지만 제공되는 제품들의 수량에 제한이 있어 두번째 목록이 제공되는 네번째 목요일 오후 2시에는 그야말로 광클의 광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광클이라 함은 미친듯이 클릭한다는 신조어입니다 ^^).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물건이 따로 있는지라 LCD TV 나 프로젝터 혹은 수천불을 홋가하는 헬스기기들은 그야말로 0.01 초내에 사라지기도 하며 목록이 공개되는 시간 2-3분간은 가끔 아마존의 리뷰어를 위한 시스템이 다운되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대개 첫번째 목록에서 만족할만한 상품을 공급받기 때문에 두번째 목록이 공개될 때는 편안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혹시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게 없나만 슬슬 봅니다.  두번째 목록은 웹페이지로 20페이가 넘는 큰 분량이기 때문에 후반부에 집중된 비싼 상품들에 사람이 몰려서 목록 초반부나 중반부에 가끔 알짜배기가 남아있기도 하거든요. 그래봐야 5-10분내에 사라지지만요. ^^

그럼 리뷰어들은 그냥 무제한 상품을 공급받느냐?  한가지 제한이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상품의 75% (4개 중 3개) 를 리뷰해야만 다음 물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제한을 채우지 못하면 목록을 볼 수는 있지만 물건을 고를 수는 없습니다.  역으로 이야기 하자면 매달 4개까지 받을 수 있으니 한개 정도는 내가 리뷰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필요한 것을 고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저같은 경우 지난달에 제법 값이 나가는 전동 드릴과 드라이버를 이런 목적으로 골랐습니다.  사실 제가 전동 드릴에 대하여 리뷰를 쓸만큼 잘 알지 못하지만 이사를 하는 바람에 힘이 좋은 전동 드릴과 드라이버가 필요했었거든요. ^^;;

리뷰는 아무렇게나 써도 됩니다. ^^ 아마존에서 리뷰에 관한한 아무런 제약도 두지를 않았습니다.  달랑 한줄만 써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읽는 사람이 비추를 주겠지만 ^^) 혹평을 써도 됩니다.  리뷰의 내용에 관해서는 아마존이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자유롭게 쓰게 놔두는 것은 큰 장점입니다.  리뷰 부실하게 썼다고 잘린 사람도 아직 못 보았습니다. ^^

여기까지 읽어오신 분이나 제가 이 프로그램에 관해서 설명하면 모든 분들이 가지는 의문점은 언제나 이것 하나입니다.

 "그러면 리뷰어는 어떻게 되는건데?"  ^^;;

이 리뷰 프로그램은 아마존의 초청에 의해서만 가입이 가능합니다.  즉 아마존에서 자격이 된다 하는 사람들에게 초청 이메일을 보내서 이를 수락함으로써 참여가 가능합니다.  저의 경우는 예전에 아마존에서 캐논사의 하드 디스크형 캠코더 (HG10) 을 사고서 훌륭한 품질을 가지고 있으나 이의 리뷰가 없는 것이 안타까워 안되는 영어로 장문의 리뷰를 썼었는데 이게 그 제품의 베스트 리뷰로 추천을 500개 넘게 받는 바람에 초청장이 온 것 같습니다 (아마존에 가 보신 분은 알지만 그 제품에 대하여 가장 많은 사람의 추천을 받은 리뷰가 제일 먼저 나오는 베스트 리뷰가 됩니다).  물론 단 한편의 리뷰로 뽑히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가끔 리뷰어들이 모이는 포럼에서도 우리가 왜 뽑혔을까 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데 역시 양질의 리뷰를 다수 올리는 분들이 프로그램에 초청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있는 리뷰어들 중에 리뷰수가 2천에서 3천에 달하는 분도 굉장히 많고 대부분 수백개 이상의 리뷰를 하신 분들입니다.

아마존에서는 여러분들이 발견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전문 리뷰어들이 쓴 리뷰에 관해서는 다른 색깔로 명명백백하게 표시를 합니다.  아래의 스크린 캡춰샷을 보시면 선명한 녹색으로 "Customer review from the Amazon Vine Program" 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리뷰어 이름 밑에도 "Vine Voice" 라고 표시가 되어 있구요.  그래서 리뷰어들이 마치 일반인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일을 방지해 줍니다.


현재 전체 리뷰어가 몇명인지 지역별 분포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희 리뷰어들도 참 궁금해 하거든요.  제가 포럼을 통해서 본 바로는 다른 한국분들은 거의 못 보았구요 (개인적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제가 살고 있는 도시나 주 전체에도 많은 수가 계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아마존 리뷰어로 활동한다는 분들도 만나보지 못했구요.  수백명 규모가 아닐까 이렇게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내일이 이번달 세번째 목요일이고 또 새로운 상품을 받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네요. ^^  미국에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말단 회사원인지라 이것 저것 지름신이 와도 영접을 못하는 불쌍한 소시민인데 매달 4개씩 여러 신상을 받을 수 있으니 아마도 제가 미국에 와서 생긴 일 중에 두번째로 멋진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번째는 제 꿈을 이룬거요 ^^).  

대충 세어보니 지난달까지 3년이 넘는 리뷰어 활동기간동안 80개가 넘는 상품을 받았고 한 제품당 $200 씩만 계산을 해도 $16,000 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물건을 무료로 받아왔네요.  제가 받는 물건들이 HD 캠코더나 디카, 컴퓨터 주변기기들이 주로인지라 단가가 제법 세거든요.  

가장 비싼 것은 $1500 정도 하는 캠코더였고 적게는 $20 짜리 닌텐도 DS 게임도 받아봤네요 (조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느라 ^^).  $1000 (약 120만원) 이나 하는 무선 HDMI 송신장치 같은 경우는 이런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꾸었을 제품이구요 (이 제품은 집에서 천정에 달려있는 프로젝터로 HDMI 신호를 쏘느라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저를 잘 아는 분들은 매달 염장질이라고 비난(^^)도 많이 하시고 회사동료들은 가끔씩 회사로 배달되는 아마존 상자들 덕분에 대단한 쇼핑광인줄 아는 분도 있구요. 아, 물론 일일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때마다 그 분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리뷰어는 어떻게 되는건데?" ^^).

아마존이 (혹은 물건을 제공하는 회사들이) 참 세심한 점이 리뷰용 물건을 제공할 때 관련된 모든 소모품을 함께 줍니다.  예를 들어 디카가 배달이 되면 그안에 4기가나 8기가의 메모리 카드가 들어있구요, 한번은 30만원이 넘는 컴퓨터로 조정을 하는 무선 조정 장난감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게 무려 건전지를 20여개 가까이 쓰는 제품인데 그 20개의 건전지가 고가의 충전용 건전지로 함께 포함이 되어서 배달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리뷰를 바로 할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해줍니다.

전 한국에서도 리뷰어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는 물건을 소유하지는 못했고 써보고 돌려주곤 했었습니다.  제가 리뷰하는 제품이 노트북 컴퓨터였던지라 뭐 증정하기에는 너무 비싼 물건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매달 최신 최고가의 노트북을 만져보는 즐거움에 너무 기쁘게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YMCA 컨슈머 리포트 때는 한번에 42 대의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던 즐거운 일도 있구요.  그렇지만 지금처럼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물건은 가져야 제 맛 아니겠습니까?

아무쪼록 이 글이 어떤 분들에게는 염장질이 되는 글이 아니었으면 좋겠구요,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정보성 글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서평논란에 관해서는 아마존 리뷰질을 전문적으로 해온 사람으로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건 다른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마존 리뷰어라서 햄볶아요.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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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가까운 지인의 컴퓨터의 갑자기 사라진 데이터를 복구하기위해 도움을 드린 경험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을 것이구요, 저도 그 중 기억에 남는 하나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글 중에 많은 분들이 아실만한 유명 연예인 분이 등장을 하는데 편의상 A 혹은 그녀라고 칭하게 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실명으로 유명인의 이야기를 썼다가 본의아니게 여러 매체에 인용이 된 원치않는 경험이 있어서 그리하였습니다. 그냥 저의 블로그에서 몇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이고 검색을 통해서 나오는 글이 되기를 원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물론 글을 읽으시면 누군지 금방 아실 수 있는 그런 분이고 제가 이미 저의 블로그에서 등장 하셨던 분입니다. ^^;;  

글의 성격상 경어체가 아닌 낮춤말로 쓰게 됨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저도 처음으로 경어체가 아닌 글을 쓰게 되지만 이렇게 해야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 개인적으로는 그 분을 사석에서 선생님으로 부르지만 여기서는 글의 문맥상 그녀라고 부르는 것을 그 분도 양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  그럼 본론으로..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동아리 등의 모임 후 어느 뒷풀이에서나 늘상 빠지지 않는 행사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순서였다.  지금이야 노래방이 있으니 이런 일이 없겠지만 그때만 해도 한 사람이 서서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부지런히 소주를 기울이며 관심없이 각자 떠들다가 노래가 끝날라 치면 무조건 박수를 치는 그런 분위기는 캠퍼스 주변이면 어디서나 흔한 풍경이었다. 그때가 80년대 중반을 넘어설 무렵이었고 이때 혜성같이 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놀랄만한 가창력을 가진 작은 몸집의 여가수가 부른 노래는 그야말로 국민가요라고 해도 될만큼 번져나갔고 이러한 뒷풀이 모임에서 그녀의 노래를 제대로 흉내(그녀의 노래는 도저히 똑같이 부를 수는 없었다 ^^)내는 학생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스타가 되곤 했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저물어 갔고 그녀 역시 계속해서 쉬지 않고 히트곡을 내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가수로 위치를 굳히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가창력하면 언제나 첫손에 꼽히는 대형가수가 되어 있었다.

그 후 거의 25년, 치기어린 대학생 시절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미국의 어느 자그마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추억의 한장을 장식해 줬던 가수가 그리 멀지 않은 같은 동네에 살게 된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꽤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쌍동이로 이루어진 두개의 도시 합쳐서 인구가 10만 남짓한 소도시에 그야말로 전설이 아닌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가수가 와서 살게된 것은 나름 작은 도시의 흥미로운 가쉽거리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직장과 집 그리고 그때는 학위를 마치지 못한터라 주말이면 도서관에 박혀 살던 나에게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이 되었고 가끔 쇼핑센터나 집 주변의 공원에서 아내와 우연히 스치는 일들이 있었던지라 이를 통해 이 전설적인 가수는 사람을 만나기를 꺼려한다는 얘기만을 들을 수 있었다.

가쉽도 몇달이지 어느듯 그녀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사라지고 이제 우리동네에 사나 하는 생각도 옅어질 무렵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부군 되시는 분과 안면을 트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작은 인연의 끈과 몇가지 일로 좀 더 A 씨 부부와 가까워질 기회가 있게 되었고 어느덧 저녁도 함께 하고 집에도 몇번 드나들 기회가 생기는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A 씨 부부는 비교적 이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있는 편이라 누가 일부러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이곳 사람들도 잘 모를 정도가 되었고 한국의 연예 매체들만이 미국에서 뭐하고 사나 유일하게 궁금해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부부와 함께 그 분 댁에 잠깐 들릴 일이 있었다.  내 차로 어디를 함께 다녀오던 길이라 차를 주차시키고 뒤늦게 차고를 통해 집으로 들어가다 보니 한쪽에 버려진 것처럼 놓여져있는 타워형 하얀 데스크탑 컴퓨터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컴퓨터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컴퓨터만 보면 다른 어떤 물체보다도 본능적으로 눈길이 가는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컴돌이인가 하면서도 곧 시선을 돌려 행여 찬 바람에 난방이 새어나갈까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그 컴퓨터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내게 되었다.

샴페인: 아까 들어오면서 차고에 덩그러니 컴 한대가 놓였있던데 뭐예요?
A 님 부군: 아, 그거? 고장난거야.  지난번에 침수가 되어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하실에 침수가 되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쓰던 데스크탑 컴퓨터가 망가져서 그냥 버릴려고 내다 놓았단다.

샴페인: 저거 누가 쓰시던 건데요?
A : 제가 음악 작업 하느라 쓰던 거예요.
샴페인: 음악 작업요???


예전에 컴퓨터로 음악 한답시고 컴퓨터로 이것 저것 해보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음악 작업'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갑자기 머리를 툭 하고 한대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샴페인: 그렇다면...  음악 작업하시던 데이터들이 있었을 텐데 그것들은 괜찮아요?
A : 그거요? 뭐 할 수 없지요.


시크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얘기를 하는 그녀 때문에 한번 더 놀랐다.  이메일 작성하다가 적은 몇줄만 키조작 실수로 날려먹어도 온갖 난리를 치는 나로서는 자기의 음악 작업 데이터를 잃어버리고도 할 수 없지 뭐 하고 관조적으로 얘기하는 그녀가 순간 참 대단해 보였다.

샴페인: 데이터가 별로 없었나 봐요.
A : 그렇진 않아요. 이것 저것 이곳에 있는 동안 작업한 것들이 다 들어있었어요.


으악..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이때가 벌써 그분이 이곳에 머문게 2년이 넘었을 때이니 그 작업량이 적지 않았으리라 예상하는 것도 그리 무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응접실에는 자그마한 사이즈의 그랜드 피아노가, 몇개의 방으로 꾸며진 지하에는 한 방에는 드럼이, 다른 방에는 노래방 기계가 설치된 걸로 봐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을 그분을 생각해 보면 뭔가 중요한 데이터들이 있었으리라고 혼자 짐작해 보았다. 더구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게 어느정도 결정이 되면서 당시 14집을 준비하고 있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터였다.  무료하고 할 일 없는 이곳에서 편안하게 음악 작업을 해왔을 것임은 누구라도 짐작을 할 수 있었으리라.

오케이, 샴페인의 트레이드 마크 1번 오지랍 발동..

샴페인: 제가 한번 저 컴퓨터 복구해 볼까요?
A : 그러실 수 있겠어요?


당시 나는 그 분의 남편을 '선배님'이라고 불렀었다.

샴페인: 선배님, 제가 한번 저 컴퓨터 가져가서 들여다 볼께요.
A 님 부군: 그래? 너 고칠줄 아냐?  그러던지..


부부의 무관심속에 버려져 있던 차고 한쪽의 타워형 컴퓨터를 훌쩍 들어서 차에 싣고 돌아왔다.  버릴려고 내 놓았던 터라 어쩌면 며칠만 늦게 봤어도 그냥 사라졌을 그런 컴퓨터이다 (우리 동네는 쓰레기 픽업을 일주일에 한번씩 한다).  안되면 옵티컬 드라이브라도 건져서 중고로 써야지 하는 심정으로 들고 왔다.  물이 들어갔다면 메인보드나 그래픽 카드 그리고 메모리들은 복구불가능한 데미지를 입었음이 분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하드디스크를 떼어서 내 컴퓨터의 SATA 용 하드디스크 케이블에 연결해 보니 인식이 안된다. 그러나 플래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고르게 나는 것을 보니 하드웨어는 살아있는 듯 했다. 아마 어떤 이유에서든 소프트웨어적인 문제가 생긴 듯 했다.

개인적으로 쓰는 몇개의 복구툴을 차례로 돌려보니 '브라보!' 파이널 데이터에서 하드디스크에 있는 파일목록을 좌르르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사실 모든 파일들을 다 복구할 필요는 없는 듯하여 조심스럽게 음악 데이터로 보이는 것들만 복구하기로 했다.  다행히 예전에 어쭙잖게 음악 소프트웨어들을 만지던 경험이 있어서 어떤 것들이 음악 데이터라는 것은 짐작이 가능했었고 주욱 화면에 펼쳐지는 음악 데이터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나즈막하게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파일들의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더의 수도 적지 않았고 그 중 하나의 폴더명은 다름이 아닌 요즘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가수와 연기자 그리고 국민 예능 프로그램 및 토크쇼에서 꽃미남으로 진가를 발휘하는 A 씨가 발굴하고 키웠던 슈퍼스타 L 군의 이름이었다.  아마 과거에 그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음악이었거나 아니면 그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음악이 아닌가 싶다.  파일의 날짜를 보니 제법 시간이 된 걸 보니 말이다.  파일의 확장자는 좀 생소해서 예전에 내가 쓰던 음악툴들은 아니지 싶었다.

조심스럽게 음악 데이터들만 살려서 가지고 있는 공 DVD 들 중에 그래도 제법 신뢰성이 젤 높다는 Verbatim 에 구웠다.  혹시나 이삿짐들 사이에 "이거 무슨 CD 지?" 하고 의아해 하다가 버려질까봐 예전에 아마존에서 증정 받았던 DVD 인쇄가 가능한 컬러 프린터로 DVD 표면에 제목과 내용을 정성스레 인쇄하고 한 오지랍 더해서 예전에 함께 식사를 같이 했었던 딸아이의 사진 하나를 컬러로 눈에 띄게 인쇄해 넣었다. ^^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신 탓에 복구를 마치고 개선장군인양 의기양양하게 그 분의 집으로 다시 향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음악 데이터가 담긴 DVD 를 그 분의 손에 전해 드렸다.

A: 어, 이거 복구가 가능하던가요?


어느 정도는 기쁨에 가득한 얼굴로 맞아주리라고 예상했던 나로서는 살짝 미소가 감도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참 그녀답다고 생각을 했다.  많이 만나보진 못했지만 사석에서 만나는 그 분은 언제나 감정 표현이 지극히 절제가 되어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환하게 웃음을 잘 짓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옅은 미소 정도가 내가 볼 수 있는 전부 다였다.  덕분에 머쓱해 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나는 국민가수의 사라질뻔한 귀중한 자산을 복구해낸 사람이 아닌가.

나는 약간은 수다스럽게 제법 곡들이 많던데 어떻게 이걸 그냥 포기할 수 있으셨냐고 침을 튀겼지만 그 분의 대답은 간단했다.

A: 그냥 할 수 없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그녀의 시크함이라니...  저를 혹시라도 기억하시라고 딸아이 사진도 컬러로 인쇄해 넣었다고 얘기하는 나에게 그녀는 "좀 특별한 분이세요" 라고 짧은 말과 함께 조금은 더 큰 미소를 날려주었다.

A: 이거 신세를 어떻게 갚죠?


고마우셨긴 했나 보다.  당시에 떠날 날을 며칠 앞두고 있지 않았기에 당장 저녁이라도 한끼 얻어먹을 수 있기는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감사 말에 무심코 나온 나의 대답은 지금 생각해도 온 손발이 다 오그라들 정도이고 어디다 얘기하기도 부끄러운 멘트였다.

샴페인: 이미 대학시절에 저에게 좋은 음악으로 갚아주셨어요.


아....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들께 사죄를 구한다.  왜 그랬지?

다행히,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음악 데이터는 모두 무사히 복구가 완료되었고 그 후 한번 쯤 더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녀는 그녀의 팬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녀의 14집이 발매가 되었고 시간상 분명히 내가 복구한 데이터들은 그 앨범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복구를 완료한 시점에서 곡 선정은 이미 끝났던 단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15집에는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한국에 들어온다면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일식집에서 저녁을 사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고 그 후 내가 한국에 들어갈 일이 없어서 아쉽게도 그녀에게 약속을 지킬 기회를 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14집이 나오고 얼마 안있다가 바로 내 이름을 적어놓은 싸인 CD 를 미국까지 보내주었고 그 일은 이곳에도 자세하게 소개한바 있다 (http://myusalife.com/25)

사실 내가 복구한 노래들이 앞으로 15집에 들어갈지 아닐지는 전혀 모를 일이고 설사 들어간다 해도 내가 그녀의 음악을 틀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도 못할 것이다 (왠지 그녀가 발표하지 않은 음악을 먼저 들어보는 일이 매우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또한 꽃미남 가수 L 군의 다음 힛트곡이 될지 아닐지 역시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어떤 데이터 복구 작업보다도 기억에 남아있고, 생각할때마다 흐뭇해짐은 아마도 유명인과 어떻게든 인연이 닿아있는 일이기에 좋아하는 나의 속물근성의 발로임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녀가 잊기전에 한국에 가서 정말 비싸다는 그 일식집의 저녁을 얻어 먹어보고 싶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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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저의 미국의 소도시의 일상들을 관심깊게 봐 주시는 분들을 위하여 오늘도 용기를 내어 작은 이야기를 하나 올려봅니다.

한국에서 '고3 학부형' 이라고 하면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중량감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고3인 학생을 위주로 돌아간다고 하는 얘기들을 친구들이 많이 들려주곤 합니다. 사교육 문제 및 학교생활 등 여러가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친구들과의 전화 등을 통하여 쏠쏠히 듣곤 하는데 그 이유가 주로 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고3 수험생을 많이 두고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침 미국의 고3 학부형인 제가 이곳의 이야기도 들려드리면 어떨까 해서 쓸데없는 글이나마 몇자 적어봅니다

 먼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50개의 주가 모두 다 각각 독립된 나라라고 해도 될만큼 너무 다르고 한 주에서도 도시 규모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어서 저의 경우가 '미국은 다 그렇더라' 라는 걸로 오해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미국의 한 중소도시에서 사는 고3 학부형의 이야기 정도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경우가 역시 또 아주 희귀한 그런 경우는 아니라는 다소 헛갈리는 말씀도 첨언을 해봅니다. ^^



요즘 들어 아내와 자주 하는 얘기가 '우리가 한국에 살았어도 고3 학부형으로 제대로 지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에서의 고3 학부형과 여기는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학기는 한국과 달리 8월말쯤 시작해서 5월이나 6월에 끝납니다. 저의 아이는 여기 미국식으로는 12학년이고 한국으로 하면 정확히 고3입니다. 고등학교에서 마지막 학년이고 내년에 대학을 진학하니까요.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은 흔히 'K-12' 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K (Kindergarten, 유치원) 에서 12학년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은 유치원이 공교육 시스템에 들어와 있습니다.

저의 아이는 학생수가 천명정도 되는 9학년에서 12학년까지 있는 고등학교 (High School) 에 다닙니다. 미국에서는 보통 6학년부터 8학년까지를 중학교 (middle school) 이라고 부르고 고등학교는 각각 학년에 따라 freshman (9학년), sophormore (10학년), junior (11학년), 그리고 senior (12학년) 으로 부르니까 고등학교가 4년제인 셈입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대학입시를 사실상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은 고3의 특정한 달에 수능을 일제히 보는데 비하여 미국은 대학입시로 가장 널리 쓰이는 ACT (에이씨티 라고 읽습니다) 와 SAT (역시 에스에이티 라고 읽습니다) 라는 시험을 언제든 볼 수 있으며 (원하면 고1에도 볼 수 있습니다 ^^)

이 시험을 주관하는 기관도 국가기관이 아닌 사설기관입니다. 좀 더 덧붙이자면 ACT 는 ACT. Inc 라는 회사에서, SAT 는 College Board 라고 하는 비영리기관에서 하고 시행은 여러분 잘 아시는 토플 시험을 주관하는 ETS 에서 합니다. 그러니까 능력이나 여건이 되는 학생은 일찍 봐버릴 수도 있고 여러번 볼 수 도 있습니다.


ACT 와 SAT 는 시험을 보는 과목이 약간 다르고 ACT 가 약간 더 까다롭고 과목수가 많아서 SAT 를 선택하는 학생이 좀 더 많은 편입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대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젤 많이 보는 시험도 SAT 입니다. 아마 한번쯤 SAT 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물론 미국에 있는 한국 학부형님들 중에서는 한국의 고3처럼 각종 과외에다가 명문 기숙학교에 보내서 자녀를 대학 보내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심지어는 방학이면 한국으로 자녀들을 보내서 한국에 있는 쪽집게 SAT 학원을 다니게 하기도 합니다. ^^

하지만 저처럼 평범한 회사원이자 미국의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여느 고3들이나 다름없이 대학을 준비시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좀 특별한 것 같지만 특별한 준비를 안한다는 얘기입니다. ^^;;

먼저 고3인 저의 아들의 예를 들어볼까요? 미국의 교육시스템의 장점은 '주체적인 인간' 을 키우는데 많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소 관념적인 단어를 썼지만 사실은 '니 일 니가 알아서 해라' 인간으로 키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단 대학을 가는데 있어서도 그야말로 학생들이 제 멋대로 생각하고 지가 가고 싶은 학교, 지 생각대로 간다는 뜻입니다. 만 3살에 미국에 와서 사실상 미국 아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저의 아들녀석도 그렇습니다. 자기 엄마도 '나 이렇게 아이를 내버려둬도 되나?' 싶게 자유롭게 키우는데다가 대학을 가는 것을 '지가 알아서 할 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 부부가 얘가 대학을 지원하는데 있어서 해준 일이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없네요.

저의 아들 녀석은 고3을 일년 앞둔 쥬니어 (고2 후반? 미국은 고등학교가 4년제이니) 가 되면서 대학에 갈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ACT 시험 준비를 시작했거든요. 대개의 통상적인 코스가 ACT 를 준비하고 여기서 점수가 원하는 대로 안 나온다 싶으면 SAT 까지 보는 그런 케이스인데요, SAT 가 독해 (Reading), 수학 (Mathematics) 과 작문 (Writing) 의 세과목으로 되어있는데 반하여 ACT 는 영어 (English), 수학 (Mathematics), 독해 (Reading), 과학논리 (Science Reasoning) 등 4과목에다 따로 작문 (Writing) 이 추가되어 5과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뭐 한국의 수능에 비하면 몇과목 되지도 않죠? ^^;;

여기도 과외가 있습니다. Tutor (개인교사) 라고 부르는데 정말 일대일 가정교사의 형태도 있구요, 집단으로 하는 형태도 있습니다. 아들 녀석은 ACT 공개강의에 몇번 가본 것 같습니다. ACT 가 뭔지 잘 모르기도 했구 나름 정보를 얻고 싶기도 했나 봅니다. 아마 엄마도 한번 가보라고 권유를 한 것 같습니다.

자 그럼 미국 고3 학생들의 생활은 어떨까요? 이 부분이 역시 한국과 제일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아들녀석은 학교에서 축구부에서 활동을 합니다. 체육특기자로 진학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고등학교 생활 내내 선수를 했고 고2나 고3 생활중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거의 매일 축구를 하루에 2시간 이상, 토요일은 시합으로 언제나 바빴던 것 같습니다. 또 고3으로 올라오면서부터는 일도 시작했습니다. 동네 쇼핑몰에 있는 Old Navy 라는 브랜드의 옷가게에서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주로 주말에 일하고 가끔씩 추수감사절 대목 (블랙 프라이데이와 이어지는 주말들) 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12시간씩 일을 하기도 하더군요.


[지역 뉴스에 나왔던 아들 녀석의 축구 골 소식 하나]

 일을 하게 된 동기는 돈 보다도 앞으로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알바를 해야할텐데 아무래도 과거에 일을 한 경력이 있어야 일자리를 구하기 용이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원서에도 이러한 알바 경력이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힘든 때에 고등학생으로서 일자리를 구한 것이 참 다행스럽습니다.   참 월급은 우리 동네 미국 법정 최저임금인 시간당 $8.50 을 받습니다. 세금을 떼고 나면 $6.50 (한 7-8천원) 정도 되지 싶습니다. 참고로 저희 동네에서 빅맥 세트 메뉴가 $5.50 정도 하니 한시간 일하면 빅맥 세트 하나 사먹고 커피 한잔 먹을 수 있네요. ^^ 아이 말로는 일단 일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최저 시급으로 제안을 했다고 하네요.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고등학교 3학년이 매일 축구를 하고 주말이면 옷가게에서 일하는 생활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대학 가기를 포기한 그런 아이는 아닙니다. 몇개의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교를 자기가 정한 후에 2학년 때 미리 ACT 시험을 몇번 보았다가 자기가 갈 학교에 적당한 점수를 맞고는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더군요. 부모맘이야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본인은 이 정도 점수면 내가 가고자 하는 학교에 지원하기에는 적당해 하고 스스로 어느 선에서 끝내버리더군요. 덕분에 고2때 이미 입시를 끝내버렸습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끝낸게 아니라는 것 다시 한번 강조드립니다 ^^ 보통 고2때 입시 끝냈다 하면 다들 "아드님이 공부 잘하시나 봐요?" 하셔서...).

미국은 8월말에 신학기가 시작되니 전해 12월인 지금이 한참 원서를 준비할 때입니다. 미국도 수시처럼 미리 지원을 해서 결정을 하는 제도가 있는데 (early decision 이라고 합니다) 아들 녀석도 2군데 정도 그런 곳에 응시를 한 모양입니다. 이는 12월 15일경이면 보통 발표가 납니다. 일반적인 입시들은 입학하는 당 해의 1월부터 4월사이에 결정 통보가 가니 매우 일찍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지요. 이렇게 들으시다시피 고3이라고 온가족이 난리나고 호들갑 떠는 것 별로 없습니다 (물론 목숨 걸고 명문대 가겠다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한국에 비하여 비율이 현저하게 낮습니다. 동부의 명문 학교 주변이나 서부의 돈 많고 교육열 높은 곳에서는 그런 비율이 좀 높구요). 그냥 부모는 지켜봐 주면 혼자 알아서 하는 시스템입니다. 아들 녀석도 고3에 와서는 혹시 필요할지 몰라 일반적인 시험이 아닌 좀더 전문적인 SAT subject test 몇개를 더 준비하는 것 같더군요. 즉 추가과목 시험을 봐서 그 시험을 제출하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그런 시험입니다. 예를 들어 SAT Chemistry Subject Test 라고 하면 기존의 SAT 시험 이외에 화학과목을 추가로 시험을 봐서 화학이 필요한 화학과나 의대를 준비하기 위한 대학교에 갈때 유용하게 쓸 수가 있죠. 필수는 아니구요.

어쨌든 저와 아내는 고3 학부형이면서도 참 맘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저희가 고3 학부형이라고 그동안 한 일은 학교에 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작문(essay)을 해서 내야 하는데 그 작문 실력이 본인이 모자란다고 하여 개인교습을 알아봐 준 것, 대학교에 지원할 때 부모들이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알려주는 재정지원(financial aid) 세미나에 가본 것 정도가 고작이네요 (한국에서는 미국 대학 지원을 할 때 쓰는 essay 를 전문적으로 돈을 받고 써주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 에세이라고 하는게 던져진 주제에 보통 300 단어 내외로 쓰는 거라 어렵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입학 사정 조건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 부모로서 도와준게 한가지가 더 있네요.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교 2-3군데에 직접 데리고 가서 그 학교에서 하는 설명회에 참여한 적이 있네요.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학교의 이모저모도 듣고 학교의 장점에 대하여 폭넓게 이야기하는 것도 들을 수 있었고 여러가지 질답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캠퍼스 구경도 잘 했구요.


[캠퍼스 투어중에 한장 찰칵]

저의 아이는 수시에 2개 정도, 정시에 5-6개 학교 정도를 지원할 계획이구요, 제가 형편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장학금이나 재정지원을 많이 알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작년에 저희 아이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보니 졸업생 한명 한명마다 어디로 진학하게 되는지를 대형 화면으로 다 보여주는데 생각보다 좋은 학교에 가는 학생이 드물고 70%가 넘는 학생들이 지역의 Community College 라고 한국으로 치면 전문대와 비슷한데 좀더 직업에 심층화된 2년제 학위 학교로 진학을 하더군요.

물론 이런 커뮤니티 칼리지에 가면 학점 교환이 되기 때문에 일반 명문 4년제 대학으로 편입도 쉽고 수업료도 상당히 싸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이곳에서 왠만한 기초 및 교양과목을 다 듣고 주변의 유명 주립대학등으로 편입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한국에서 오는 학부 유학생들도 이런 과정을 가장 많이 쓰구요. 그리고 커뮤니티 칼리지 다닌다고 주변에서 시선을 아래로 보지도 않구요. ^^;;


[아들 녀석이 공부하고 싶어하는 과의 건물 전경]

저랑 아내는 참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고 어려운 시기라는 고3 수험생을 둔 가장의 책임감을 이렇게 홀가분하게 벗어버리고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처럼 대학 학위가 필수로 되어 있는 한국에서 당분간은 현재의 입시 체계가 단시간에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이곳처럼 한국도 부모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아이들도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진학을 여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여러가지 일상의 소소한 일에 관심이 많은 저의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고3 학생과 학부형, 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이렇게 살고 있답니다. 아울러 한국에서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헌신적으로 드리고 계시는 학부형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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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토요일에 자원봉사로 저희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 매점에서 일하면서 느낀 소소한 몇가지를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시골이라도 해도 좋을 미국 소도시의 일상에도 관심 가져 주시고 귀하게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내어 잡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펼쳐 보겠습니다. ^^

저의 아이는 한국으로 치면 고3이고 미국의 교육제도로는 12학년, 유식하게는 시니어(senior)라고 부르는 고등학생입니다. 다소 널널한 미국의 교육 시스템 덕에 고3 임에도 불구하고 축구부에서 선수로 활동하면서 하루에 2시간 30분씩 연습을, 주말이면 때로는 차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까지 가서 시합을 하고 있습니다. 축구선수라고 하시면 공부로서의 진학은 포기하고 본격적인 운동선수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하실 수 있으시겠으나 실은 운동으로 진학할 맘이 전혀 없는 순수한 대학 입학 지원생입니다. 나중에 다른 글을 통하여 미국에서 축구선수로 산다는 것, 미국의 축구에 대하여 그 부분은 본격적으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의 학교 운동부들 역시 심각한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데 거의 모든 재정을 부스터 클럽(Booster Club) 이라고 하는 학부모들이 운영하는 지원회에서 마련해서 운동부를 꾸려 나갑니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재정 조달 방법 중의 하나가 운동경기때마다 매점 (Concession Stand 라고 합니다. 극장의 매점도 컨세션 스탠드라고 합니다) 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학부모들이 약간의 돈을 기부해서 재료들과 물품을 사서 경기때마다 파는 것이지요. 그래서 운동 선수를 둔 부모들은 예외없이 교대로 여기 매점에서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보통 한학기에 두번을 하는데 저 한번, 아내 한번 하고나면 한학기가 갑니다. 파는 물품들은 M&M 이나 스니커즈 같은 쵸콜렛 종류, 캬라멜이나 각종 작은 단위로 포장된 칩들, 그리고 음료수, 직접 만든 햄버거, 핫도그들 각종 주전부리입니다. 때에 따라서 도너츠같은 것도 추가가 되기도 합니다.

질 낮은 핸드폰 사진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몇장 첨부해 봅니다. 아래의 사진은 제가 일하는 매점 안쪽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작은 공간에 각종 쵸콜렛, 카라멜, 칩들이 구석에 전시된게 보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저 조그마한 창을 통하여 손님을 맞습니다.


의외로 인기있는 품목이 직접 만들어 파는 햄버거나 핫도그입니다. 한쪽에서 전담 학부형 한분이 그릴로 햄버거 패티나 핫도그 소세지를 신나게 굽습니다. 연기 자욱한 것 보이시죠? 참고로 햄버거 하나의 가격은 2500원 정도 하고 핫도그는 1500 원 정도 합니다. 캔 콜라 같은 경우는 1000원 정도 받고 플라스틱 병에 든 게토레이는 1500원을 받습니다 (일하면서 알게된게 게토레이를 노랑색, 파란색, 오렌지색을 파는데 파란색의 판매비율이 80%가 넘을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 그런데 캔 콜라의 경우 세일을 이용해 대량 구입하면 한 캔에 250원 정도면 구입이 가능하니 마진이 무려 750원이나 된답니다. ^^;; 다른 것도 이 정도 마진이겠죠? 



그리고 햄버거와 핫도그 못지 않게 팔리는게 워킹타코(Walking Taco) 라고 하는데 한국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칩 (여기서는 프리토스(Fritos)라고 하는 옥수수칩을 씁니다) 을 뜯은 후에 그 안에 따끈한 칠리소스와 야채, 치즈를 넣고 포크를 하나 꽂아 줍니다. 그럼 봉지채 손에 들고 포크로 칩과 칠리소스, 야채, 치즈를 버무려서 비빔밥 (아니 그 뭐죠? 군대에서 봉지채 끓이는 라면) 처럼 먹습니다. 제법 맛납니다. 


대체로 4명 정도 한팀이 되어 매점을 꾸려나가는데 한분은 햄버거 패티와 핫도그 소시지를 굽고 한분은 워킹 타코를 만들고 또 한분은 냉장고와 만들어진 핫도그를 보관하고 꺼내주는 일을 하고 마지막 한명이 손님을 맞이하며 판매하는 일을 합니다. 저는 매대에서 손님을 만나는게 좋아서 언제나 직접 파는 일을 합니다. 밖에서 본 매점은 대충 이렇게 생겼습니다.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낌없이 사먹습니다. 별로 재밋거리가 없는 미국 생활인지라 이렇게 동네 고등학교팀 축구를 보면서 이것 저것 사먹는게 나름 빅재미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축구 경기 같은 곳에 가서 손에 천원짜리 (사실은 딸라 ^^) 한장 쥐어주면 엄청 좋아하면서 뭘 사먹을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나름 귀엽습니다. 참고로 밖에서는 이런 식으로 축구경기가 신나게 펼쳐집니다. 언제나 한팀은 원정팀이므로 작게는 1시간 때로는 몇시간 떨어진 곳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미국 생활이라는게 회식도 없고 야근도 별로 없고 주말이면 딱히 할일이 많지 않아 학부형들이 이러한 일들을 기획하고 꾸리는데 제법 시간과 돈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다들 열심히 합니다. 저야 그렇게 다른 학부형처럼 부스터 클럽 회의에 나가거나 임원진으로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강제적인(^^) 자원봉사를 할 때면 다른 학부형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나누고 손님을 맞이하면서 얼굴도 익히고 나름 재미나게 합니다. 봉사시간도 평균 3시간 정도이니 그렇게 과하지도 않구요.

평소에 불친절한 사람들을 진저리나게 싫어하는 성격이라 매점에서 물건을 팔 때면 정말 이보다 더 친절한 사람 이 세상에서 못봤지 라는 각오로 과잉친절을 베풉니다. 사실 저 같은 사람은 미국에 오래 살아서 뻔뻔해서 그렇지 미국에 막 온 한국 학부모들은 이런 일을 무척 부담스러워 합니다. 학부모로써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고 영어로 사람을 상대하는게 생각보다 꽤 스트레스가 됩니다. ^^;;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은 2 달러 정도 쥐고 와서 그 몇개 안되는 메뉴임에도 불구하고 뭘 사먹을까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고민하는 꼬마 아이의 모습을 보는 일입니다. ^^;; 얼굴에 다 써있습니다. 햄버거를 먹자니 돈이 좀 모자라고 음료수랑 칩을 사자니 쵸콜렛 바도 먹고 싶고 뭐 이런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커플이 다가옵니다. 얼굴이나 몸을 움직이는게 불편한데다가 많이 마르신 것을 보니 뇌성마비가 있으신 분들 같습니다. 잠깐 사족을 붙이자면 미국에 와서 제일 흐뭇했던 것이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섞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참 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을 뿐더러 행여 아이들이 실수라도 하면 (예를 들어 저 아저씨는 왜 팔이 없어? 라고 묻는 경우라든지) 부모들이 정중히 사과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잘 설명을 하고 받아들이는 장애인 분들도 충분히 납득하는 그런 모습이 보기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예전에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저희 집 근처에 뇌성마비 자녀를 둔 분이 자녀들을 데리고 외출을 잘 못하는 경우를 보았던 적이 있었거든요.

어쨌든 남매인지 커플인지 아리송한 커플이 옵니다. 먼저 여자분께서 힘겹게 말을 떼십니다. 알아듣기가 참 힘이 듭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자연스럽습니다. 왜냐구요? 아직도 영어를 어차피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처지거든요. ^^ 그렇기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excuse me 를 최대한 공손하게 하면서 한단어 한단어 들어봅니다. 다행히 매점에서 해야할 단어들이 그리 많지 않은지라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알아들었습니다 (자꾸 다시 묻는게 너무나 죄송하거든요). 남성분께서는 뒤에서 줄 서있는 분이 부담스러운지 안절부절 못하십니다. 이분도 장애가 있으셔서요. 뒤에 서계신 분들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계신지라 이 남성분께서 먼저 주문하시라고 힘겹게 꼬여있는 손을 들어 제스쳐를 취하니 그제서야 공손히 제가 먼저 주문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두번 여쭙고 (첫번째는 장애가 있으신 분 반응이 명확치 않았거든요) 먼저 주문을 하십니다. 바라보고 있는 저도 참 흐뭇합니다. 서로 배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결국 안절부절하시던 장애가 있으신 분도 주문을 무사히 마치고 기쁘게 핫도그를 들고 가시는데 두 다리 전체에 보조장치가 되어 있어서 힘겹게 걸어가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까 그 여성분이 계시던 곳으로 기뻐 걸아가시는 모습에 잠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고등학교의 운동팀은 보통 1군인 발시티 팀 (Varsity Team) 과 2군인 쥬니어 발시티 팀 (Junior Varsity Team) 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학교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교 대표 운동 선수이다라는 것을 발시티 팀 선수다라고 얘기합니다. 아무래도 고등학교 팀의 경우 발시티 팀은 고3 위주로, 쥬니어 발시티 팀은 1-2학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1학년이지만 잘하는 선수는 바로 발시티 팀에 편성이 되고 이는 운동선수에게 큰 영예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등에서 혹시 우리 아이는 신입생(Freshman)인데 발시티 팀에서 뛴다라는 대사를 듣게 되시거든 이제 바로 이해가 되실 겁니다. ^^

그래서 언제나 같은 종목의 경기가 두번 있습니다. 각 학교의 쥬니어 발시티 팀끼리 한번, 그 다음에 발시티 팀끼리 붙습니다. 저는 아이가 발시티 팀에 소속이 되어 있어 먼저 경기를 하는 쥬니어 발시티 게임에서 이렇게 자원봉사를 하고 발시티 경기가 있을 때는 쥬니어 발시티 학부형들이 매점에서 일하는 교대 시스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대를 해주어야할 오후 팀 부모님들이 무슨 일이 있는지 한분도 오시지 않습니다. 연락이 잘 안되었는지... 오전부터 계속 일하던 부모님들이 그냥 계속 일합니다. 뭐 불만 이런 것 없습니다. 주말 오후에 딱히 할일들이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 다만 아이들이 경기를 하게 되므로 적당히 들락날락하면서 자기 아이 경기를 봅니다. 교대로 선수들이 들락날락하니 자기 아이가 뛸 때는 좀 나와서 보다가 안할 때는 들어가서 일좀 돕다 이런 식입니다. 저는 아들 녀석이 좀 길게 뛰는 바람에 농땡이를 좀 더 많이 깠네요. ^^

오전 10시 45분에 와서 두 팀의 경기가 끝나고 정리하고 하니 오후 3시가 되네요. 이렇게 토요일 하루가 저물었네요. 한국에 있었다면 주변 친척들의 결혼식이나 아이들 돌잔치 혹은 전날 밤새 술마신 피로 때문에 뻗어 있을 시간에 그래도 해 보면서 광합성도 하고 다른 부모님들이랑 이빨도 까고 자원봉사도 하고 그리 후회스럽지 않은 시간을 보냈네요. 실수로 사이다 캔을 떨어뜨려서 터지는 바람에 그것 팔 수 없어 제가 공짜로 하나 홀라당 주워 먹었네요. 사이다 캔이 떨어지자마자 같이 일하는 학부모 한분이 농담을 진하게 하시네요.

"You're Fired! (넌 해고야 !)"

모두 함께 ㅋㅋㅋ 웃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고등학교 학부형의 토요일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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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분위기에 취해 써보는 뻘글을 한번 올려봅니다.

한국에 계신 대부분의 분들은 토요일 저녁 잠에 취하고 계실텐데 지구 반대쪽 이곳은 적당히 멋지게 흐린 날씨를 가진 토요일 오후 3시경입니다. 회색빛 구름이 아주 적당하게 하늘을 두르고 있는... 여기는 참가해야할 결혼식도 없고 동창 모임도 없고 그야말로 온전히 다 제 시간인 그런 시간입니다.

모처럼 집 뒷뜰에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고 앉아서 마치 초가을같은 바람을 맞으며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속의 모서리만 빼꼼한 책이 혹시 보이시나요?)


등 뒤에는 자체 앰프가 내장된 무선블루투스 스피커가 스마트폰과 연결되어 제가 사는 지역과는 아무 상관없는 KBS FM 의 '요조의 히든트랙' 방송을 아주 명료한 사운드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삶이 잠시나마 너무나 감사하여 뻘글 한번 올려봅니다. 제가 바라보는 전경은 이렇습니다. 구름이 너무 포근합니다.


잠시나마 여러분들에게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순간이었으면 합니다. 눈 앞의 호수에서 뿜어대는 분수가 바람탓인지 제 얼굴까지 날아오네요.

저와 음악 그리고 책밖에 느껴지지 않는 소중한 순간을 잠시 담아 보았습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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