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가까운 지인의 컴퓨터의 갑자기 사라진 데이터를 복구하기위해 도움을 드린 경험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을 것이구요, 저도 그 중 기억에 남는 하나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글 중에 많은 분들이 아실만한 유명 연예인 분이 등장을 하는데 편의상 A 혹은 그녀라고 칭하게 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실명으로 유명인의 이야기를 썼다가 본의아니게 여러 매체에 인용이 된 원치않는 경험이 있어서 그리하였습니다. 그냥 저의 블로그에서 몇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이고 검색을 통해서 나오는 글이 되기를 원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물론 글을 읽으시면 누군지 금방 아실 수 있는 그런 분이고 제가 이미 저의 블로그에서 등장 하셨던 분입니다. ^^;;  

글의 성격상 경어체가 아닌 낮춤말로 쓰게 됨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저도 처음으로 경어체가 아닌 글을 쓰게 되지만 이렇게 해야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 개인적으로는 그 분을 사석에서 선생님으로 부르지만 여기서는 글의 문맥상 그녀라고 부르는 것을 그 분도 양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  그럼 본론으로..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동아리 등의 모임 후 어느 뒷풀이에서나 늘상 빠지지 않는 행사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순서였다.  지금이야 노래방이 있으니 이런 일이 없겠지만 그때만 해도 한 사람이 서서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부지런히 소주를 기울이며 관심없이 각자 떠들다가 노래가 끝날라 치면 무조건 박수를 치는 그런 분위기는 캠퍼스 주변이면 어디서나 흔한 풍경이었다. 그때가 80년대 중반을 넘어설 무렵이었고 이때 혜성같이 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놀랄만한 가창력을 가진 작은 몸집의 여가수가 부른 노래는 그야말로 국민가요라고 해도 될만큼 번져나갔고 이러한 뒷풀이 모임에서 그녀의 노래를 제대로 흉내(그녀의 노래는 도저히 똑같이 부를 수는 없었다 ^^)내는 학생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스타가 되곤 했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저물어 갔고 그녀 역시 계속해서 쉬지 않고 히트곡을 내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가수로 위치를 굳히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가창력하면 언제나 첫손에 꼽히는 대형가수가 되어 있었다.

그 후 거의 25년, 치기어린 대학생 시절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미국의 어느 자그마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추억의 한장을 장식해 줬던 가수가 그리 멀지 않은 같은 동네에 살게 된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꽤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쌍동이로 이루어진 두개의 도시 합쳐서 인구가 10만 남짓한 소도시에 그야말로 전설이 아닌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가수가 와서 살게된 것은 나름 작은 도시의 흥미로운 가쉽거리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직장과 집 그리고 그때는 학위를 마치지 못한터라 주말이면 도서관에 박혀 살던 나에게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이 되었고 가끔 쇼핑센터나 집 주변의 공원에서 아내와 우연히 스치는 일들이 있었던지라 이를 통해 이 전설적인 가수는 사람을 만나기를 꺼려한다는 얘기만을 들을 수 있었다.

가쉽도 몇달이지 어느듯 그녀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사라지고 이제 우리동네에 사나 하는 생각도 옅어질 무렵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부군 되시는 분과 안면을 트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작은 인연의 끈과 몇가지 일로 좀 더 A 씨 부부와 가까워질 기회가 있게 되었고 어느덧 저녁도 함께 하고 집에도 몇번 드나들 기회가 생기는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A 씨 부부는 비교적 이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있는 편이라 누가 일부러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이곳 사람들도 잘 모를 정도가 되었고 한국의 연예 매체들만이 미국에서 뭐하고 사나 유일하게 궁금해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부부와 함께 그 분 댁에 잠깐 들릴 일이 있었다.  내 차로 어디를 함께 다녀오던 길이라 차를 주차시키고 뒤늦게 차고를 통해 집으로 들어가다 보니 한쪽에 버려진 것처럼 놓여져있는 타워형 하얀 데스크탑 컴퓨터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컴퓨터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컴퓨터만 보면 다른 어떤 물체보다도 본능적으로 눈길이 가는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컴돌이인가 하면서도 곧 시선을 돌려 행여 찬 바람에 난방이 새어나갈까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그 컴퓨터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내게 되었다.

샴페인: 아까 들어오면서 차고에 덩그러니 컴 한대가 놓였있던데 뭐예요?
A 님 부군: 아, 그거? 고장난거야.  지난번에 침수가 되어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하실에 침수가 되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쓰던 데스크탑 컴퓨터가 망가져서 그냥 버릴려고 내다 놓았단다.

샴페인: 저거 누가 쓰시던 건데요?
A : 제가 음악 작업 하느라 쓰던 거예요.
샴페인: 음악 작업요???


예전에 컴퓨터로 음악 한답시고 컴퓨터로 이것 저것 해보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음악 작업'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갑자기 머리를 툭 하고 한대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샴페인: 그렇다면...  음악 작업하시던 데이터들이 있었을 텐데 그것들은 괜찮아요?
A : 그거요? 뭐 할 수 없지요.


시크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얘기를 하는 그녀 때문에 한번 더 놀랐다.  이메일 작성하다가 적은 몇줄만 키조작 실수로 날려먹어도 온갖 난리를 치는 나로서는 자기의 음악 작업 데이터를 잃어버리고도 할 수 없지 뭐 하고 관조적으로 얘기하는 그녀가 순간 참 대단해 보였다.

샴페인: 데이터가 별로 없었나 봐요.
A : 그렇진 않아요. 이것 저것 이곳에 있는 동안 작업한 것들이 다 들어있었어요.


으악..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이때가 벌써 그분이 이곳에 머문게 2년이 넘었을 때이니 그 작업량이 적지 않았으리라 예상하는 것도 그리 무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응접실에는 자그마한 사이즈의 그랜드 피아노가, 몇개의 방으로 꾸며진 지하에는 한 방에는 드럼이, 다른 방에는 노래방 기계가 설치된 걸로 봐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을 그분을 생각해 보면 뭔가 중요한 데이터들이 있었으리라고 혼자 짐작해 보았다. 더구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게 어느정도 결정이 되면서 당시 14집을 준비하고 있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터였다.  무료하고 할 일 없는 이곳에서 편안하게 음악 작업을 해왔을 것임은 누구라도 짐작을 할 수 있었으리라.

오케이, 샴페인의 트레이드 마크 1번 오지랍 발동..

샴페인: 제가 한번 저 컴퓨터 복구해 볼까요?
A : 그러실 수 있겠어요?


당시 나는 그 분의 남편을 '선배님'이라고 불렀었다.

샴페인: 선배님, 제가 한번 저 컴퓨터 가져가서 들여다 볼께요.
A 님 부군: 그래? 너 고칠줄 아냐?  그러던지..


부부의 무관심속에 버려져 있던 차고 한쪽의 타워형 컴퓨터를 훌쩍 들어서 차에 싣고 돌아왔다.  버릴려고 내 놓았던 터라 어쩌면 며칠만 늦게 봤어도 그냥 사라졌을 그런 컴퓨터이다 (우리 동네는 쓰레기 픽업을 일주일에 한번씩 한다).  안되면 옵티컬 드라이브라도 건져서 중고로 써야지 하는 심정으로 들고 왔다.  물이 들어갔다면 메인보드나 그래픽 카드 그리고 메모리들은 복구불가능한 데미지를 입었음이 분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하드디스크를 떼어서 내 컴퓨터의 SATA 용 하드디스크 케이블에 연결해 보니 인식이 안된다. 그러나 플래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고르게 나는 것을 보니 하드웨어는 살아있는 듯 했다. 아마 어떤 이유에서든 소프트웨어적인 문제가 생긴 듯 했다.

개인적으로 쓰는 몇개의 복구툴을 차례로 돌려보니 '브라보!' 파이널 데이터에서 하드디스크에 있는 파일목록을 좌르르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사실 모든 파일들을 다 복구할 필요는 없는 듯하여 조심스럽게 음악 데이터로 보이는 것들만 복구하기로 했다.  다행히 예전에 어쭙잖게 음악 소프트웨어들을 만지던 경험이 있어서 어떤 것들이 음악 데이터라는 것은 짐작이 가능했었고 주욱 화면에 펼쳐지는 음악 데이터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나즈막하게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파일들의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더의 수도 적지 않았고 그 중 하나의 폴더명은 다름이 아닌 요즘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가수와 연기자 그리고 국민 예능 프로그램 및 토크쇼에서 꽃미남으로 진가를 발휘하는 A 씨가 발굴하고 키웠던 슈퍼스타 L 군의 이름이었다.  아마 과거에 그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음악이었거나 아니면 그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음악이 아닌가 싶다.  파일의 날짜를 보니 제법 시간이 된 걸 보니 말이다.  파일의 확장자는 좀 생소해서 예전에 내가 쓰던 음악툴들은 아니지 싶었다.

조심스럽게 음악 데이터들만 살려서 가지고 있는 공 DVD 들 중에 그래도 제법 신뢰성이 젤 높다는 Verbatim 에 구웠다.  혹시나 이삿짐들 사이에 "이거 무슨 CD 지?" 하고 의아해 하다가 버려질까봐 예전에 아마존에서 증정 받았던 DVD 인쇄가 가능한 컬러 프린터로 DVD 표면에 제목과 내용을 정성스레 인쇄하고 한 오지랍 더해서 예전에 함께 식사를 같이 했었던 딸아이의 사진 하나를 컬러로 눈에 띄게 인쇄해 넣었다. ^^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신 탓에 복구를 마치고 개선장군인양 의기양양하게 그 분의 집으로 다시 향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음악 데이터가 담긴 DVD 를 그 분의 손에 전해 드렸다.

A: 어, 이거 복구가 가능하던가요?


어느 정도는 기쁨에 가득한 얼굴로 맞아주리라고 예상했던 나로서는 살짝 미소가 감도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참 그녀답다고 생각을 했다.  많이 만나보진 못했지만 사석에서 만나는 그 분은 언제나 감정 표현이 지극히 절제가 되어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환하게 웃음을 잘 짓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옅은 미소 정도가 내가 볼 수 있는 전부 다였다.  덕분에 머쓱해 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나는 국민가수의 사라질뻔한 귀중한 자산을 복구해낸 사람이 아닌가.

나는 약간은 수다스럽게 제법 곡들이 많던데 어떻게 이걸 그냥 포기할 수 있으셨냐고 침을 튀겼지만 그 분의 대답은 간단했다.

A: 그냥 할 수 없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그녀의 시크함이라니...  저를 혹시라도 기억하시라고 딸아이 사진도 컬러로 인쇄해 넣었다고 얘기하는 나에게 그녀는 "좀 특별한 분이세요" 라고 짧은 말과 함께 조금은 더 큰 미소를 날려주었다.

A: 이거 신세를 어떻게 갚죠?


고마우셨긴 했나 보다.  당시에 떠날 날을 며칠 앞두고 있지 않았기에 당장 저녁이라도 한끼 얻어먹을 수 있기는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감사 말에 무심코 나온 나의 대답은 지금 생각해도 온 손발이 다 오그라들 정도이고 어디다 얘기하기도 부끄러운 멘트였다.

샴페인: 이미 대학시절에 저에게 좋은 음악으로 갚아주셨어요.


아....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들께 사죄를 구한다.  왜 그랬지?

다행히,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음악 데이터는 모두 무사히 복구가 완료되었고 그 후 한번 쯤 더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녀는 그녀의 팬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녀의 14집이 발매가 되었고 시간상 분명히 내가 복구한 데이터들은 그 앨범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복구를 완료한 시점에서 곡 선정은 이미 끝났던 단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15집에는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한국에 들어온다면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일식집에서 저녁을 사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고 그 후 내가 한국에 들어갈 일이 없어서 아쉽게도 그녀에게 약속을 지킬 기회를 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14집이 나오고 얼마 안있다가 바로 내 이름을 적어놓은 싸인 CD 를 미국까지 보내주었고 그 일은 이곳에도 자세하게 소개한바 있다 (http://myusalife.com/25)

사실 내가 복구한 노래들이 앞으로 15집에 들어갈지 아닐지는 전혀 모를 일이고 설사 들어간다 해도 내가 그녀의 음악을 틀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도 못할 것이다 (왠지 그녀가 발표하지 않은 음악을 먼저 들어보는 일이 매우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또한 꽃미남 가수 L 군의 다음 힛트곡이 될지 아닐지 역시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어떤 데이터 복구 작업보다도 기억에 남아있고, 생각할때마다 흐뭇해짐은 아마도 유명인과 어떻게든 인연이 닿아있는 일이기에 좋아하는 나의 속물근성의 발로임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녀가 잊기전에 한국에 가서 정말 비싸다는 그 일식집의 저녁을 얻어 먹어보고 싶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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