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롤모델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존경하는 분이 있겠지만 저에게는 존경하는 분은 반드시 생존해 계셔야 한다는 그런 우스광스러운 철칙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과 시대를 지나며 배움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어설픈 이유에서이죠.  사실 존경하는 분은 총 4분인데 한분이 2년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철칙도 깨져버렸습니다만은..  ^^;;

그 존경하는 분이 한 여성 가수를 참 좋아하셨더랩니다.  여러분들도 어쩜 아실 수 있는 그 이름 가수 이지연씨입니다.  오래전 어느날 이 분이 가수 이지연씨의 근황을 저에게 물어보셨었습니다.  그리 심각하게 물어보신 것은 아니셨었는데 아마 이지연씨가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우찌 알겠습니까, 이 큰 미국 땅덩어리에서.. ^^  저라면 알거다라고 생각을 하셨었던거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

존경하는 그 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저는 결국 이지연씨의 팬카페까지 가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뿔싸 등업을 해야지만 근황 사진을 볼 수가 있더군요. 가입인사와 시덥잖은 댓글 몇개로 힘겹게 등업을 받고 드디어 그녀의 몇년전의 미국에서의 일상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그 분께 보내드리면서 홀로 뿌듯했던 것도 벌써 몇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아틀란타라는 도시에 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저에게 미국의 죠지아주 아틀란타라는 도시는 언제나 그 가수가 사는 도시로 제일 먼저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제가 회사에서 아틀란타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겼습니다.  출장이 결정되자마자 제 머릿속에는 오랫동안 혼자 생각해왔던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존경하는 그 분에게 그 분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직접 동영상 메시지를 받아서 선물로 드리자!! 이거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짓을 저지른 경험이 있습니다.  LPGA 골프선수 박지은을 열렬히 좋아하는 캐나다인 친구에게 박지은 선수를 만나서 그녀가 직접 보내는 메시지를 동영상으로 따다가 준 적이 있었거든요 (이곳에 글로 소개를 한적도 있습니다.  나의 부탁을 들어준 스포츠 스타라는 글입니다) 그때 감격해 하던 그 친구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원래 저의 출장 스케쥴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입니다.  거리가 있는 만큼 비행기를 타고 가야합니다.  회사측에 얘기해서 월요일 새벽 대신에 토요일 새벽에 떠나겠다고 양해를 구합니다.  물론 5년 정도 방문하지 못했던 아틀란타의 지인들을 주말 이틀에 걸쳐 만나보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역시 메인 이벤트는 이거였습니다. ^^;;

모든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토요일 새벽에 아틀란타 공항에 도착을 했고 지인 한분께서 공항에 나와 픽업을 해주시고 오랜만에 뵙는 분들과 하는 점심은 정말 꿀맛같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아틀란타는 현재 제2의 골드러시라고 불릴만큼 LA 에 이어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집중되는 지역인만큼 한국 사람들이 살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고 아틀란타에서 먹는 한식은 한인들에게 미국 제3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시카고의 그것보다도 훨씬 훌륭했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즉시 준비했던 프로젝트의 수행에 착수를 했습니다.  다행히 저의 설명을 들으신 아틀란타의 지인분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연예인 만나보겠다고 하는 일이 참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의 이런 엉뚱한 면을 잘 이해해 주신 덕분에 토요일 오후를 그녀를 만나는 일에 투자하기로 합니다.  다행히 이미 인터넷을 통하여 오랫동안 호텔 요리사로 일하고 있던 그녀가 개인적으로 식당을 개업해서 나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 식당의 주소도 이미 손에 넣고 있었습니다.  한가지 참 뿌듯했던 것은 미국에서 식당의 평에 관한 한 가장 정보가 많고 일반인들의 평이 제대로라고 알려져있는 Yelp.com 에서도 그녀의 식당은 엄청나게 좋은 평가를 얻고 있었습니다.

막상 찾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 한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과연 그녀는 내가 가는 시간에 일하고 있을까? 왜냐하면 한국의 경우를 보면 유명인이 경영하는 식당의 경우 유명인의 이름을 걸어놓을 뿐이지 그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기 떄문이어서 그렇습니다.  또한 있다고 한들 만나볼 수나 있을까?  주방에 있을텐데...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더군요.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오... 그녀가 있답니다... 그런데 몹시 바쁘답니다.  온다고 해도 만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답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고 그래도 비교적 한가하리라 짐작되는 3시 30분경을 전후해 도착하기로 합니다.  차편을 제공해 주시고 운전까지 해주시는 지인은 예전에 그녀의 전남편과 같이 일해본 적이 있다고 혹시라도 개인적인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이리저리 연락하는 수고를 해주시기도 하여서 참 감사했습니다.  이 지인 분도 오랫동안 온라인으로 알고 지내다가 실제로는 처음 뵙는 분이고 저보다 연배도 높으신 분인데 저의 발이 되어주시고 자택까지 숙소로 제공해 주시는 데다가 이런 엉뚱한 일까지 함께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식당은 일반적인 한인들이 많은 곳도 아니고 식당가들이 몰려있기로 유명한 곳도 아닌 전혀 동떨어진데 있었습니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어 찾아가는데 토요일 낮의 교통체증을 뚫고 한참 달려간 곳은 부동산 업을 하셨던 지인조차 참 뜬금없다고 하는 그런 곳에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지나치기도 했었습니다.  네비로 찾지를 못해 좀더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드디어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식당은 예상보다는 크기가 작았고 참 멋져 보이는 아파트들 사이에 살짝 숨어 있었습니다.

내가 기획하였던 일을 성공할 수 있을까 깊게 한숨을 쉬고 들어서자 서빙을 보는 분이 "지연을 보러 왔느냐?" 라고 먼저 물어보아서 놀랐습니다.  제가 했던 전화를 기억하거나 나처럼 찾아오는 한국 사람이 또 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만 차마 물어볼 마음의 여유가 그때는 없었습니다.

오..오..오..

뻥뚫린 아주 커보이지는 않는 주방안에는 3명의 요리사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혼자서 하얀 옷을 입은 그녀가 요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바베큐 전문 식당인데 맛있게 고기를 재우기 위하여 열심히 국물을 내고 이를 저으며 고기를 재우는 일을 하는 그녀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얼굴마담이 아닌 진짜 요리사였습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빤히 바라보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일에 열중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용 요리를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그날이 토요일이었으니 무척 바쁜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어쩌지..

일단 음료를 하나 가져다 테이블에 놓고 홀짝 홀짝 지인분과 나누어 마시며 그녀가 한가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전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지금의 소녀시대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가 이제는 중년이 되어 늙수구레한 자태를 자랑하는, 그녀를 보겠다고 주책없이 찾아 온 아저씨 앞에서 열심히 저녁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다행히도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서빙을 보는 친절한 흑인 아가씨에게 전달받은 그녀가 손을 쓱쓱 훔치며 나옵니다.  오...  나름 유명인을 많이 만나봐서 별로 감흥이 없을거라는 제 예상과는 달리 이곳에 온 목적을 설명하는 저는 살짝 떨고 있었습니다.   훗...

"제가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보다 열살 위이신데 부족한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 그 분에게 그 분이 좋아하는 당신의 메시지가 담긴 동영상을 담고 싶어서 이렇게 일리노이주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라고 또박 또박 설명을 했습니다.  그녀는 다행히도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지만 아쉽게도 비디오만은 곤란하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몇번 간곡히 부탁을 했지만 그녀는 참으로 정중하게 난색을 표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연예계를 비공식적으로 은퇴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간간이 주목을 받는 그녀이기에 그럴수 있다고 이해가 가더군요.  그 대신에 그녀가 먼저 제안을 합니다.  그 분께 가는 메시지를 적어주겠다고.. 사실 개인적으로 연예인의 싸인을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만 (시간 지나고 나면 어디 갔는지도 모르게 되는게 싸인이더군요 ^^)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기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존경하는 분의 성함을 말씀드렸더니 멋지게 싸인을 하여 주었습니다.

마침 그녀도 휴식시간이었는지 주방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그녀와 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걷어올린 그녀의 팔뚝에는 여기 저기 데인 자국이 눈에 띕니다.  바베큐 식당에서 큰 팟이나 들통을 다루다 보면 충분히 생길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요리사의 훈장입니다.  이제 그녀에게서는 다른 연예인에게 볼 수 있는 후광은 없었지만 아이라인 하나와 살짝 립스틱이 바른 것외에 아무 화장도 안한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거기다가 상냥하고 격의없이 얘기해 주시는 모습은 브라운관에서의 모습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식당에 서서 나누던 이야기가 식당 밖에 나가서 하는 이야기로 이어졌고 같이 간 지인분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저는 안으로 들어와서 같이 일하는 종업원 두분에게 그녀가 얼마나 한국에서 인기있는 가수였나를 침이 튀도록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나에게 그녀의 상냥한 인간성을 열을 내어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서 참 흐뭇했었습니다.

이렇게 얼굴만 보고 갈 수 없어 그녀에게 직접 추천을 받아 그 식당에서 가장 맛있다는 조합으로 돼지 바베큐를 take out 을 했습니다.  마침 하룻밤을 신세를 지는 지인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가지 않았던 터라 이렇게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었거든요.  조곤 조곤 음식에 대해 설명하는 그녀에게서는 왕년의 스타가 가질 수 있는 회한의 향기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진솔하게 자기 식당의 음식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설명하던 그녀에게서 자신의 음식에 대한 프로의 애정이 느껴져서 정말 좋았습니다.

인기 가수에서 요리사로 변신해 성공적인 길을 가는 그녀에게 어줍짢게도 저는 저도 그렇게 인생의 전환을 가져봐서 얼마나 힘든지 안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주제넘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면서 대화를 해주었던 그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나중에 지인 분의 집에 돌아와 먹어본 그녀가 직접 만든 돼지 바베큐와 고구마 샐러드, 그리고 Brunswick 이라고 명명된 수프는 정말로 최고였습니다. 그녀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제가 미국에 와서 먹어본 돼지 바베큐 중 테네시주의 채터누가시에서 먹었던, 미국 대통령이 즐겨 찾는다는 Sticky Fingers 의 그것보다도 월등히 훌륭했습니다.  나중에 Yelp 의 일반 회원 리뷰를 꼼꼼히 읽어보니 아틀란타에서 가장 유명한 Fat Matt 이라는 식당의 음식보다, 혹은 텍사스 주에서나 맛볼 수 있는 바베큐보다도 훌륭하다는 평까지 있어서 저를 즐겁게 했습니다.

이렇게 맛이 있고 인터넷 평이 호평 일색인 식당이니 분명 식당은 대박일 것이고 그녀의 요리사로서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바쁜 토요일 오후의 자투리 시간에 그녀를 보겠다고 달려와서 무리한 부탁을 했던 한 팬에게 대해주었던 그녀의 따뜻한 마음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녀의 건투를 빕니다.

P.S. : 이러한 종류의 글은 역시 인증샷이 없으면 의미가 없겠죠? 그녀를 단독으로 찍은 사진이 있지만 아쉽게도 잘 나오지가 않아서 같이 간 지인이 찍어준 저와 함께 한 사진을 올립니다.  본의아니게 저도 같이 인증하게 되었는데요, 모자이크를 하자니 그것도 이상하여 그냥 올립니다.  양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S. 2 : 아래 사진은 제가 한참 이지연씨와 담소를 나눌 무렵 지인이 찍어주신 사진입니다.  제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어 보고 있으면 참 감사하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사진입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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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분이시라면 왕년의 프로야구 선수 이만수 선수를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가 미국 메이져 리그 야구팀 화이트삭스의 코치로서 2005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했을 때 우승 사진 속에서 혹은 카퍼레이드 영상에서의 그가 저는 정말로 자랑스러웠습니다.  화이트삭스는 제가 살고 있는 일리노이주의 가장 큰 도시인 시카고의 팀이라서 저에게는 연고지 팀이거든요.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SK 팀의 2군 감독으로 활약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이만수 선수가 미국의 이민법 소송 케이스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Lee v. Ziglar, N.D. III. 2002) 저도 이곳에 살면서 지역 신문의 이민법 관련 칼럼을 쓰시는 변호사의 글에서 처음 발견한 사실인데요, 이와 관련하여 오늘은 미국의 영주권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lee mansu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거머쥔 이만수 선수


이만수 선수가 화이트삭스 코치로 일하고 있을 때 구단에서는 그를 잡기 위해 그에게 취업이민 1순위 영주권을 신청을 하게 됩니다.  화이트삭스야 자타가 공인하는 대형구단이고 미국에서 취업이민 1순위 영주권은 회사의 재정규모와 영향력에서 거의 결정이 나는만큼 누구나 그의 영주권 취득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주권은 미국 이민국에 의하여 거절이 됩니다.  당시 이만수 선수는 코치로서 영주권 신청을 하였었는데 한국에서 프로야구 MVP까지 딴 그이지만 미국 이민국은 그의 선수로서의 화려한 경력이 미국에서 코치로 성공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냉혹하게 거절해 버립니다.  이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라도 다른 나라의 코치로 영주권이 가능하지 않다는 판례로 남게 됩니다.  혹시 관련업에 종사하시는 분이라면 위에 제가 적어놓은 소송 케이스를 열람해 보셔도 될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놈의 미국 영주권은 뭘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시민권과 영주권의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 영주권자, 시민권자 이런 얘기는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말입니다.  간단히 한줄로 말씀드리자면 미국 영주권자는 한국 국민이며 미국 시민권자는 미국인입니다.
 
영주권이라는 것은 사실 별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국에 관광을 가거나 직장을 잡아 취업을 하거나 유학의 목적으로 체류하려면 각각의 목적에 해당하는 비자가 필요하며 비자에 관련된 내용들은 혹독할 정도로 제재조항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취업비자의 경우 미국에서 직장을 잡아 일을 할 때 필요한데 갑자기 직장에서 해고되어 하루라도 직장이 없이 노는 날이 있다면 바로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어 버립니다.  관광비자나 유학비자도 그 비자의 유효기간만큼만 미국에 머무를 수 있으며 비자를 미국에서 취득하거나 변경하는 경우에는 미국 밖으로 나가게 될 경우 한국인의 경우 한국의 주한 미국 대사관에 가서 처음 비자를 신청했을 때의 서류를 모두 다시 준비해 가서 인터뷰를 다시 받아서 비자 스티커를 받아 여권에 붙여서 미국에 돌아와야 합니다. 이를 스탬핑(Stamping)이라고 하는데요, 여간 번거로운게 아닙니다.  그러나 영주권을 받게 된다면 이러한 비자가 필요없이 미국을 나갔다 들어왔다를 정해진 시간 (보통 10년) 동안 얼마든지 가능하게 됩니다.  직장이 없어도 상관이 없고 영주권자를 가진 부인이나 자녀들도 일을 하거나 활동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관광비자나 유학비자등은 취업이 엄격하게 금지 되어 있고 취업비자는 당사자 이외의 가족이나 자녀들 역시 취업이 불가능합니다)
 
Green Card

미국 영주권 카드 샘플


그러나 영주권자는 국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인데 미국 영주권자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여전히 완전한 한국국민입니다. 그져 미국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는 것도 사실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미국 영주권자는 re-entry permit 이라고 특별한 허가를 맡지 않으면 미국내에서 일년에 6개월 이상을 머물지 않으면 영주권이 취소가 됩니다.  다만 미국 외의 국가로 해외 취업을 하거나 주재원 파견을 한다든지 하는 미국 정부가 인정하는 합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re-entry permit 을 발급받아서 미국외의 국가에서 오랫동안 머물러도 영주권 박탈을 당하지 않는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자면 미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해도 그냥 한국에 와서 오래 지내게 된다면 영주권 유지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유명인이 한국인임을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미국 영주권마져 포기한다고 하는 사례들이 매스컴에 소개되기도 하는데 실은 이런 사연이 뒤에 숨어있기도 합니다. ^^  그리고 미국 영주권을 가진 분들이 미국에 자꾸 들어가는 이유가 이런 미국 체류기간 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미국 영주권을 발급받은 후에 한국 여권을 갱신하게 되면 여권이 일반여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에서 거주여권으로 바뀌면서 한국에서의 주민등록이 말소되게 됩니다.  주민등록번호는 살아있으나 주민등록지가 예를 들어 서울 방배동에서 시카고 총영사관으로 옮겨지게 되며 재외 국민으로 등록되게 됩니다.

그리고 영주권을 딴 후 5년이 지나면 미국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만약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미국 국적이 되는 것이고 한국에서의 모든 주민등록번호 및 관련 기록은 말소되게 됩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려고 하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Social Security 라고 하는 연금을 타기 위한 목적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매달 일정금액이 소셜 시큐리티라는 명목으로 세금처럼 공제되어 나갑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정년퇴직을 해도 이 연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 미국의 의대나 치대 그리고 각종 대학교의 장학금은 반드시라고 해도 될만큼 시민권자를 가장 우대하고 있으며 그 다음은 영주권자순이며 비자 소지자는 뭐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만큼 문호가 작습니다.

Green Card The Movie

영화 그린 카드


한국에 사시는 분들은 이러한 체류신분의 불안정성에 대하여 실감을 못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작년에 개인적으로 갑자기 직장을 옮길 이유가 생겼는데 다음 직장을 단 하루의 격차도 없이 구하는데 문제가 있어 추방이나 다름없이 온 짐을 싸서 미국을 떠나야만 할뻔 했던 아찔한 일을 겪고 나서부터는 언제나 영주권을 따는 문제가 저의 가장 우선순위가 되었었습니다.

취업을 한 후 회사가 스폰서가 되어 영주권을 취득하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고 NIW (National Interest Waiver) 라고 하여 미국에서 학위를 따거나 학문적인 업적을 이루어서 이를 통해 영주권을 따는 방법도 유학을 통하여 미국의 연구소나 직장에 취직한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거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듭니다.  다행히 회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문 경우구요, 대부분 영주권 신청비용을 본인이 부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천만원이 넘게 듭니다.  놀랍지요? 그깟 미국을 들락날락하는 자격을 부여받는 영주권을 신청하는데 드는 비용이 천만원이 넘게 드니.. 반절 정도는 미국 이민국이 가져가는 접수료이고 반절은 변호사에게 가는 비용이구요.  물론 영주권이 거절이 되면 그 돈은 그냥 통채로 날아갑니다. ^^;;

그 험난한 과정을 거쳐 1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끝에 몇주전에 저희 가족이 영주권을 취득함으로써 영주권에 대한 많은 감회가 생긴 김에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저는 위에 언급한 NIW 라는 학위를 통하여 미국의 국익에 기여하는 자라는 것을 인정받아 받았습니다.  회사 스폰서로는 너무나 오랜시간이 걸리고 (2년 정도는 일해야 자격이 생깁니다) 아들 녀석이 곧 대학에 들어가게 되어 영주권을 빨리 취득하는게 수업료나 모든 면에서 많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전후 내용없이 영주권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드리게 된다면 '샴페인 이 친구 온갖 잘난체는 다하더니 미국에 귀화하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겠다 싶은 노파심도 글을 쓰게 되는 동기도 되었기도 하구요.  귀화는 시민권 취득을 의미하는 것이구요.

제 기분은 딱 노예해방이 된 그런 느낌입니다.  이제 저는 회사에서 잘려도(^^) 야밤도주하듯이 황급히 짐을 싸서 미국을 떠나지 않아도 되구요, 어느 나라도 방문했다가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주전 취업비자 신분일때만 하더라도 미국을 벗어나게 되면 어느 나라를 가거나 무조건 한국에 들려서 주한 미국 대사관에 인터뷰 예약을 하고 서류를 몽땅 들고가서 수십만원의 수수료를 내고 비자 스티커를 받아와야 했었거든요.  또한 미국의 거의 모든 직장들이 취업비자 스폰서를 해줘야 하는 외국인들을 달가워 하지 않아서 사원 모집요강에 명백하게 영주권자 이상이라고 못 박고 있는 형편입니다.  즉 영주권을 가진다는 것은 취업 기회가 더욱 많이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고 그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왔던 아내도 한국 슈펴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 수도, 아들 녀석도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알바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렇게 하면 불법이었었습니다).

아무쪼록 두서없는 글이었으나 이 장황한 글을 통해서 미국 영주권이라는게 뭔지, 이게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흔히 영주권은 미국에서 그린카드 (Green Card) 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녹색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남편은 누구?' 라는 닉을 쓰시는 네티즌께서 영주권은 1962년부터 2010년 5월까지는 하얀색이었고 2010년 5월 이후에 녹색으로 복귀되었다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알아두면 나쁘지 않은 상식이네요.


영주권을 취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변호사를 만나는 일입니다.  특히 학위나 미국의 국가적 이익에 기반하여 개인이 스스로 스폰서가 되어 취득하는 NIW 영주권의 경우 이의 처리 경험이 풍부하고 소통이 잘되는 변호사를 만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변호사들의 경우 영주권이 잘되거나 못되거나 수임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냉정히 자신의 상태가 영주권 취득이 가능한지 평가해 줄 수 있는 좋은 변호사를 만나셔야 합니다.  혹시 미국에서 학위를 하면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학위를 마치기 전에 영주권을 취득하시는 것이 매우 유리하며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미약하더라도 변호사와 상담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대개 이런 상담은 무료입니다 (Free Evaluation).  자신의 학위나 소속 그리고 논문 편수와 인용횟수 (Google Scholar 등으로 간단히 확인 가능합니다) 등을 알려주면 좋은 변호사라면 어느 정도의 확률로 영주권 취득이 가능하다는 것을 얘기해 줍니다.  물론 학위가 없어도 미국 안보등에 중요한 회사에서 일하는 분도 이런식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사례도 있습니다 .  저도 좋은 변호사를 만나서 추천서나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 즉 제가 준비 하여야 하는 과정들은 나름 힘들었으나 영주권 취득 과정 자체는 참 순조로웠습니다.  저는 취업비자 연장과 영주권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하나는 회사 변호사와 또 하나는 제가 고용한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두 변호사가 극명히 대비가 되더군요.  회사 취업 기반 영주권은 대개 회사 소속 변호사와 일하게 되는데 그들은 그리 급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많은 애로 사항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석사 학위 이상을 소지하고 있다면 취업 2순위 NIW (EB2-NIW) 영주권 도전을 권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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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이곳 미국에서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차에 태워서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립학교의 경우 스쿨버스가 있긴 하지만 저처럼 멀리 살 경우 스쿨버스에서 아이들이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고 저의 딸아이의 경우는 사립학교를 다니고 있어 어차피 스쿨버스가 없기에 아침마다 차에 태워서 데려다 주는 것이죠.  저의 딸아이는 4학년이고 학교는 3시 30분에 파하기 때문에 올 때는 엄마가 데리러 가죠.

이 등교 시간은 딸 아이와 단둘이 하는 아주 좋은 시간입니다.  아들도 함께 태우고 가는데 아들은 학교가 가까운 탓에 먼저 내리고 나면 딸아이와 둘이서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소녀시대 노래를 들으며 매일 아침 등교를, 저는 출근을 합니다.  요즘 딸아이의 선곡은 '무조건 해피엔딩 (Stick with you)' 와 '좋은 일만 생각하기 (Day by day)' 그리고 뜬금없이 Gee 이 세곡인데 딱 이 세곡을 들으면 학교에 도착합니다.

오늘은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동네를 한바퀴 딸아이는 자전거로 저는 조깅 스타일로 뛰고 집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열어보니 트위터로 옥동자 정종철씨가 보낸 메시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름아닌 그가 진행하는 '달려라~디오!' 에서 트위터로 신청곡을 받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우연한 일로 정종철씨를 알게 되어 가끔 쪽지 정도 주고 받는 사이지만 갑자기 우리 소시 아이들의 노래를 딸을 위해 신청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번쩍 났습니다.  마침 딸 아이도 옆에 있었고 가족들도 한데 모여있던 참이었습니다.  트위터로 즉시 우리 소시 아이들의 '무조건 해피엔딩' 을 신청했습니다.  물론 머얼리 미국에서 신청한다는 사연을 곁들여서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보이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아싸!!!

평소에 제 닉네임인 샴페인으로 쪽지를 주고받다가 실명으로 모르는 척 보냈더니 미국에서 신청이 온게 신기하다고 하면서 다른 사연들을 제쳐두고 보내자마자 제 사연을 소개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딸 아이도 부엌에서 설겆이하던 아내도 함께 정말 신기해 하며 들었습니다.  아마도 미국에서 온 사연은 처음이었던듯 여러번 저와 딸아이를 거론해 주셨고 한국 시간으로 오전 10시경 라디오를 타고 우리 소시 아이들의 '무조건 해피엔딩' 이 신나게 울려 퍼졌습니다.

[정종철의 '달려라~디오!' 방송화면]


아래는 제가 방송중 녹음하여 제가 언급된 부분만을 편집한 짧은 MP3 파일입니다.  김모모씨로 나오는게 바로 접니다요. ^^;; (play 버튼을 눌러주셔야 방송이 나옵니다)


이 단조롭기 그지없는 미국 소도시의 저녁에 저희 가족에게는 짧지만 참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전영혁씨의 라디오 음악프로에 등장한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타보네요.  얼마전 이곳에 Oh! 춤 동영상을 선보였던 딸아이 수빈이와 정말 행복하게 '무조건 해피엔딩'을 들었습니다.  딸아이의 신기해 하는 모습을 보며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지만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히힛..

[라디오 방송중에 정종철씨에게 날라온 트윗]


[방송이 끝난 후에 정종철씨에게 날라온 트윗]


나이는 한참 먹었지만 이러고 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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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이곳 미국에서 하는 본업이 아닌 일 중의 하나가 아마존에서 전자제품을 증정받아 테스트 하는 일인데요, 이번에 받은 미국에서 인기가 좋은 포켓 캠코더인 Flip 을 테스트 하기 위하여 저희 집 응접실에서 딸아이가 소녀시대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을 캠코더 성능 테스트용으로 찍었다가 이것도 나름 자료랍시고 이곳에 한번 올려 봅니다.  참고로 Flip MinoHD 2nd generation 은 휴대성이나 간편함 그리고 가격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720p HD 캠코더입니다.  미국에서 현재 제일 많이 팔리는 캠코더이기도 합니다.

Flip MinoHD

Flip MinoHD Pocket Camcorder


원래 이 동영상은 얼마전 '남자의 자격' 이라는 KBS 쇼프로그램에 나와 유명해진 소녀시대 멤버들도 자주 들린다는 삼촌팬들의 집결지인 '소시당' 에 올려 많은 격려와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곳에 올린 이유도 딸 아이의 동영상을 딸 아이가 좋아하는 수영이나 써니가 봐 주었으면 하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추천해줘서 인기글로 올라가는 바람에 그곳에 소녀시대 멤버들이 들어왔다면 보았을 것 같습니다 (댓글로 이미 멤버들이 보았을 것이라고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


딸 아이는 언젠가 미국에서 행해지는 소녀시대의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을 보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면에 있어 워낙 강경파인 딸 아이의 모친이 허락을 하지 않을 예정이므로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 동영상을 올리는 것 정도가 딸아이의 유일한 공개 퍼포먼스가 되겠네요. ^^;;  그져 어설픈 춤사위지만 팔불출 아빠의 해프닝 정도로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소녀시대 덕분에 딸 아이가 한국적인 정서와 한국어 그리고 한글을 잊지 않고 있어 저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감사한 소녀시대네요.

p.s. : 미리 작정하고 찍은게 아니고 실내에서 스며 들어오는 태양빛으로 어느정도 품질을 보여주나 갑자기 궁금해져서 찍은 것이기 때문에 화면도 약간 어둡고 아이 역시 갑자기 준비없이 불러세운거라 뭐 꾸민 모습이 아닙니다. ^^  유튜브에 버퍼링이 없으신 분은 동영상 우측밑의 360p 라고 쓰여있는 버튼을 720p HD 로 바꾸어 주시면 화면이 그나마 조금 낫습니다.  역시 포켓 캠코더는 HD 라도 실내촬영은 영 아니네요.  

p.s. 2 : 딸 아이는 혼자 TV 를 쳐다보고 춤을 익힌거라 주의 깊게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부 동작에서는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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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이곳 어바나-샴페인 (Urbana-Champaign) 은 University of Illinois 가 있는 어바나와 샴페인이 합쳐진 쌍동이 도시입니다.  흔히 Twin City 라고 하죠.  그래봐야 인구가 두 도시 합쳐서 10만을 넘기는 정도 밖에 안되고 학생만 5만명에 가까운 도시입니다만 살아도 살아도 참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서부처럼 빼어난 절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부처럼 엄청난 문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즐비한 동네도 아니고 바다를 옆에 끼고 있지도 않지만 살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생각이 되어 오늘도 하루를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제가 사는 이 도시의 사진들을 모아 동영상을 만든 것을 유튜브에서 발견을 했습니다.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 역시 일리노이 샴페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구요.  항상 제 주변 분들께 제가 사는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하면 제일 멋지게 소개할까 했었는데 이 한편의 동영상이면 될 듯하여 이곳에 올려 봅니다.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인 수학과 Altgeld Hall 로 시작되는 동영상은 자세히 보시면 이곳 출신인 최고의 Rock Band, REO Speedwagon 의 이름을 딴 거리도 나오고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영화 평론가 Roger Ebert 가 고향인 이곳에서 개최하는 영화제인 Eberfest 의 모습도, 그리고 전미 대학농구연맹 (NCAA) 결승에 오른 기쁨으로 학교를 상징하는 동상 Alma Mater 에 일리노이 대학 오렌지색 티셔츠 (일리노이 대학을 상징하는 색깔은 오렌지와 블루입니다) 를 입혀 놓은 모습 등 다양한 풍경을 포함하고 있네요.

이곳에 계셨던 분들에게는 향수를, 이곳에 오실 분들에게는 기대를 한껏 주는 동영상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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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어려운 때이니만큼 여러 어려움에 있는 분들 많으시리라 봅니다. 경제는 어렵고 여러모로 안좋은 사정은 한국이나 제가 있는 미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은 우연히 발견한 한 유튜브 비디오 클립을 보고 울컥하고 올라오는게 있어 즉석에서 함께 나누고 싶어 몇자 두드려 봅니다.

락음악을 좋아하시는 분이나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기타리스트 제이슨 베커 (Jason Becker) 에 대하여 들어보셨을 겁니다. 혹은 한번도 들어보지 않은 분들도 함께 이야기를 들어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제이슨 베커라는 친구는 정말 천재중의 천재였죠. 13살에 이미 에릭 클랩튼의 곡을 다 연주할 수 있었고 뛰어난 기타 실력으로 인해 17살에 이미 레코딩 계약을 맺고 마티 프리드만 (Marty Friedman) 이라는 친구와 프로젝트 그룹인 Cacophony 를 18살에 결성해 전세계를 놀라게 하죠. 20살에는 Van Halen 의 보컬리스트였던 David Lee Roth 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가 되어 정말 승승장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과 20살에 루게릭병 (ALS) 진단을 받고 3-5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게 됩니다.

Jason Becker

Jason Becker 의 첫번째 솔로 앨범 Perpetual Burn


루게릭병이라는게 차츰 몸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병인바 그는 점차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기능을 모두 잃어버렸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머리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이제 움직일 수 부분은 눈알밖에 없게 됩니다. 그전에는 입술과 볼 그리고 턱을 움직여 마우스 커서를 이동해서 클릭하는 방법으로 작곡작업을 해왔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고안해 낸 눈알을 움직여 알파벳 한자 한자를 얘기하는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면서 쉬지 않고 음악작업을 해옵니다. 

23세에서 25세면 죽게될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가 69년 7월생이니 올해로 만으로 40살이 되었군요. 1996년, 1999년, 2003년 그리고 2008년에도 불편한 몸으로 새로운 연주 앨범들을 연주자들을 고용해서 만들어 냈고 이미 그를 위한 두장의 헌정(Tribute) 앨범이 만들어졌으며 이 앨범에는 Steve Vai (Whitesnake 로 떠날때 제이슨 베커가 스티브 바이를 대신해서 데이빗 리 로쓰 밴드에 들어갑니다), 죠 새트리어니, 마티 프리드만 등 불세출의 기타리스트들이 참여합니다.

지금까지의 서론은 아래의 제이슨 베커의 2008년 뉴스 비디오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디오 클립에 한글 자막이 들어가 있지 않은 미국 뉴스지만 전술한 내용만으로도 비디오를 이해하시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문득 떠오른 제이슨 베커 생각에 (너무나 미안하게도 아직도 살아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본 것입니다) 검색을 해서 이 비디오를 보고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었습니다. 나는 멀쩡한 몸으로 뭘 하고 있는거지? 뭐 이런 류의 생각이 저를 엄습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올려봅니다. 오늘도 쉼없는 도전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시는 여러분들, 당신들이 바로 저에게는 제이슨 베커와 같은 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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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이 단조롭고 반복적인 편이라 이렇다하게 재미있는 일이 생기기 힘들지만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아마도 미국의 플레이보이 (Playboy) 라는 잡지를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긴장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얘기 아닙니다 ^^).  토끼 심볼로 대변되는 미국을 대표하는 성인 잡지 중의 하나죠.  미국에 오기전까지 저와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연이라면 음 하나 떠오르는게 있긴 합니다.  먼저 그 얘기 하나 하고 가겠습니다 (오늘도 얘기 길어질 것 같습니다).  ^^;;


예전에 한/글/사랑회라고 대한민국에서 HWP (아래아한글) 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HWP 를 잘 쓰는 사람들이 한글과컴퓨터사의 협찬으로 모이게 된 것인데 주로 하는 일은 서로간의 HWP 사용팁을 교환하는 것은 물론 아래아한글을 개발하는 한글과컴퓨터사의 개발자들에게 조언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원고지 몇자 이내로 원고를 제출해달라는 데가 많으니 HWP 안에서 그걸 계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개발자들에게 요구를 한다든지 아래아한글 신버젼이 나오면 베타 테스트를 한다든지 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체의 돈을 받지않는 자원봉사적인 성격이 강한 모임이었는데 (비 정기적으로 모여서 세미나도 하고 유성같은 곳에서 1박 2일로 모임을 갖기도 하고 회원님의 열의로 해남 땅끝마을에서 집담회를 갖는 등 무척 진취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여기서 참 많은 HWP 고수들을 만났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HWP 만을 이용해서 코렐 드로우에서나 이용 가능한 그림을 그려내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HWP 고수들이 컴퓨터 고수는 아니었는지 태백의 한 공고에 근무하는 회원님으로부터 어느날 인터넷에 대하여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제가 받게 됩니다 (어째 말투가 김태원 같은.. ^^).  그때가 막 인터넷의 World Wide Web 개념이 정립되고 Netscape (지금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해당하는 웹 브라우져) 와 Winsock 그리고 전화선을 이용해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웹싸이트를 이용하던 때라 공고 선생님들에게 인터넷과 World Wide Web 에 대하여 짧은 강좌를 해달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뭐 당연히 인터넷의 기원이라든지 아르파넷이라든지 밀넷이라든지 이런 이론적 얘기를 하게 되면 선생님들이 지루해할 것이 뻔한 바 제가 좀 엉뚱한 기획을 했습니다.  그때 당시 막 거의 성인 잡지 사이트로는 처음 문을 연 플레이보이사를 소개하는 걸로 강연을 이끌어 나가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태백까지 먼 길을 간 후 초청해 주신 분 댁에 여장을 풀자마자 즉시 전화선을 이용해서 플레이보이 사이트를 캐슁 (미리 담아놓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다음날 강연 현장에서 소개하기에는 너무 느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밤새 전화선으로 필요한 페이지들을 다운받아 놓고 넷스케이프를 미리 저장된 이미지를 가져오도록 셋팅을 한 후에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공고답게 많은 선생님들이 인터넷 강좌에 관심을 가졌고 선생님들을 앞에 놓고 강연하는 저는 참 뭐랄까 기분이 좋았었습니다 (제가 사람들 모아놓고 떠드는 것을 좋아라 합니다 ^^).  그러나 불과 20분도 안되어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하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식사 직후의 강연이었고 지루한 인터넷의 역사와 원리에 대하여 얘기를 하면서 Winsock 접속법에 대하여 설명을 하니 뭐가 뭔지 몰랐던 선생님들이 슬슬 무거운 눈꺼풀을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넷스케이프 웹 브라우져


자, 이제 깜짝쇼 시간입니다..  '자 그럼 실제로 월드와이드웹 써핑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가열차게 외쳐도 선생님들의 무거운 고개는 올라올 줄 몰랐습니다.  아무말도 않고 넷스케이프 웹 브라우져를 켜고 저장되었던 플레이보이 홈페이지를 불러오기 시작했습니다.  데모용 컴퓨터의 화면에 플레이보이 홈페이지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헉 소리가 시간차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헉, 헉 소리에 뭔일인지 놀란 다른 선생님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게 여러분들 혹시 아실지 모르는 플레이보이라고 하는 미국 성인 잡지의 웹싸이트입니다.  월드 와이드 웹을 이용하면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잡지도 볼 수 있고 더구나 한국에서는 나오지 않는 미국의 성인잡지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정말 국경이 없는 정보의 무차별적 교류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전날 이미 제법 건전한 (^^) 그림들만 골라 놓았었음에도 수영복을 입은 미국 처자들의 사진과 금기시되었던, 학생들에게서 찢어진 페이지로만 보았던 그 플레이보이 잡지가 모니터에 아주 선명하게 나오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선생님들의 눈빛은 모니터를 뚫을 듯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신문물에 대한 진취적인 강좌였기에 참석했던 여선생님들도 다행히 항의를 하지 않았고 그날 인터넷 강연은 아주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다만 강연이 끝나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느냐고 여쭈어 보시던 주임 선생님들의 성화가 대단하긴 했었습니다만...  ^^;;

이게 제가 플레이보이 잡지와 가진 유일한 한국에서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오고나서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제가 살고 있는 도시에 있는 대학교가 바로 플레이보이의 창립자이자 회장, 플레이보이 맨션으로 유명한 휴 헤프너 (Hugh Hefner) 가 졸업한 학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시카고에서 플레이보이 사업을 시작해서 발전시켜 가다가 현재는 캘리포니아의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매주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계시죠.  

플레이보이 창립자/회장 휴 헤프너


한가지 우스운 것은 미국의 대학교에는 건물을 기증받았을 시 그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건물 이름을 짓는데 저희 학교의 심리학과 건물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휴 헤프너라고 하지를 못했습니다.  보수적인 학교 관계자들이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휴 헤프너는 거액을 기부해서 근사한 심리학과 건물을 짓고도 끝내 이름을 부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이 때로는 이렇게 보수적입니다). 결국 심리학과 건물은 지금도 그냥 심리학과 건물로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이 동네에 사는 분들도 대부분 이 스토리를 모릅니다 ^^).

어쩄거나 이렇게 저와는 사실 아무 관계도 없는 플레이보이 잡지였지만 갑자기 이 플레이보이 잡지 떄문에 웃기는 일이 하나 생기게 됩니다.  헉, 죄송합니다.  아직까지 서론이었네요.

미국와서 하루 하루를 정신없이 살던 어느날,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데 우편함에 꽂혀있는 검은 비닐에 쌓인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집에 들어오면서 아내에게 '저 왔어요' 라고 얘기함과 동시에 검은 비닐을 북 찢자 바닥에 떨어지는 책은 바로 '허거덕!' 플레이보이 잡지였습니다.  당시 방이 2개 밖에 없는 작은 집에 살아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가 있는 부엌옆으로 붙어있는 거실에서는 아들 녀석이 천진난만하게 돌아다닐 때였습니다.  후다다닥 잽싸게 책을 집어서 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야' 

이상한 영화를 보다가 들킨 학생처럼 가슴이 조금 뛰더군요.  사실 플레이보이 잡지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주 아주 하드코어한 잡지도 아니고 사진 약간에 기사들이 대부분인 뭐랄까 소프트한 약간의 적게 입은 여성들이 나오는 잡지이긴 해도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맞이한 성인 잡지는 참 거시기하더구만요.

참고로 아래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미국의 모든 성인잡지들은 서점에서 전시할 때도 그렇고 우편으로 배달될 때도 검은 비닐로 쌓여서 배달이 됩니다.  물론 어느 편지함에 검은 비닐로 쌓인 잡지가 박혀 있으면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성인 잡지 배달 포장


책상 밑에 후다닥 던져두고 아내랑 밥을 먹고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절대 플레이보이 잡지를 한장 한장 찬찬히 들여다 본다거나 플레이보이 잡지도 새로운 쿨한 전자기기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거나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쿨럭..).  다음날 아내에게 아주 쉬크하게 '글쎄 플레이보이 잡지가 실수로 나에게 배달이 되었네? 하하하하' 하고 잡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부억 식탁 밑에서 돌아다니던 검정 포장 비닐에 제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던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했으며 아내가 다음과 같이 얘기했을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좀 덜컹하더군요..

"자기, 이거 실수가 아닌가봐, 자기 이름이 써 있는데?"

-.-;;

곰곰 생각해 보니 당시는 인터넷 쇼핑이 많이 활성화 되지 않은 때였고 여러 쇼핑 사이트에서 공짜 잡지나 이런 것들을 프로모션으로 돌릴 떄였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더욱 더 쉬크한 모습으로,

 '아마도 광고용으로 돌리는 건가봐.  난 이런 것 진짜 안 좋아하는데.. 내 주소야 쇼핑 사이트에서 얻었겠지.. 허허허..' 

이렇게 웃음으로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달에도, 그 다음달에도 어김없이 저의 우편함에는 검은 비닐로 쌓인 잡지가 꽂혀 있었습니다.  미국의 방 두개짜리 아파트에 살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편함이 매우 좁아서 언제나 잡지는 아주 아주 티가 나게 꼽혀 있었고 제 착한 이웃들은 그걸 가져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간 저는 동료들에게 신기하다는듯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은 성인 잡지도 프로모션으로 많이 돌리나봐요.  몇달째 플레이보이가 오던데 다들 경험 있지요?"

미국인 동료들이나 한국인 친구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No way, man" (절대 없었는데?)
"형, 정말예요? 저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와 땡 잡았네요."

-.-;;

저의 아내는 무척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고 저도 아내 못지않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매달 우편함에 꽂혀 있던 플레이보이 잡지는 비닐도 뜯지 않은채 휴지통으로 직행을 하였습니다.  거룩함도 거룩함이지만 코딱지만한 집이라 어디 숨길데도 없는 집에서 아이의 눈에 성인 잡지가 눈에 띄어 아버지의 존엄함이 손상되는 불상사도 원치 않았고 아내에게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남성인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던 저는 우편함에서 꺼내온 비닐도 뜯지 않은 플레이보이 잡지를 아내 눈앞에서 휴지통에 퐁당 빠뜨리는 퍼포먼스를 매달 한번씩 해야만 했습니다.

"이번달에도 왔네?" (퐁당) "참 얘네들 꾸준해" (퐁당)

누구는 샘물이 퍼져서 건너편에 있는 누나의 손길까지 닿으라고 돌을 퐁당거리는데 저는 굴지의 성인잡지를 매달 목적도 없이 퐁당 퐁당거려야 했습니다.

플레이보이 회사에 한번 연락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무려 일년이 넘게 무료로 배달이 된 후였습니다.  3개월이면 대충 중단될줄 알았던 잡지가 (미국에서 무료 프로모션은 대개 3개월입니다. 미국에서 맥을 구입하면 맥월드가 3달간 무료로 옵니다) 일년이 넘고 나자 (유료 정기구독은 일년 단위로 진행됩니다) 뭔가 착오가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물론 그동안에 무료로 플레이보이 잡지를 받는다는게 제 주변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우리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은 괜히 실없이 집안을 뚤레 뚤레 살펴댔었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아파트 건물 앞의 대형 쓰레기통(dumpster)에 고개까지 집어 넣어 한번씩 살펴보고 가곤 했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잡지를 원하는 친구들에게는 '줄서, 줄서, 니가 대기자 번호 148번째야' 라는 실없는 이야기를 건네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당시 금요일 저녁이면 청년들에게 '거룩하게 살자' 라고 얘기했던 제가 도색잡지를 나누어 준다더라 하는 소문을 들어서는 안되었기에 공짜로 받는 잡지지만 절대로 누구에게 선물로 줄 수는 없었습니다.  거룩한 사람 이미지는 이렇게 저를 사정없이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ㅠ.ㅠ

일년이 지나고 나서야 플레이보이사에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메일 주소 찾기도 쉽지 않더군요.  아마도 그들이 별로 받아 본적이 없었을 "제발 나에게 무료로 잡지를 보내는 것을 중단해 달라" 라는 내용의 아주 간곡한 이메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매달 저의 우편함에는 잡지가 보란듯이 꽂혀 있었고 앞집 사는 사람좋고 덩치 좋은 흑인 친구 제이슨은 "왓쓰 업 브로~~" 하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잡지를 보내지 말라고 하는 일도 귀찮은 일이어서 플레이보이사에 이제는 전화를 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2년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어렵게 그들의 소비자 지원센터 전화번호를 찾아 상담원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 지금 2년 넘게 플레이보이지가 무료로 오는데 제발 좀 그만 보내라"

상담원은 제 주소도 체크하고 어쩌고 성의를 보이는 듯 하더니 알았다고 처리하겠다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정말 눈물어린 호소를 했습니다.  아내가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살던 아파트에는 결국 물난리가 나고 정화조가 넘쳐서 집안이 그야말로 X물로 뒤덮여서 할 수 없이 이사를 할때까지 근 5년동안 매달 꼬박 꼬박 단 한달도 거르지 않고 플레이보이 잡지가 배달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떠나간 후 그 집에는 계속 그 잡지가 배달이 되었을테고 그 집에 살게된 사람은 그걸 어떻게 처리해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잡지는 일급 우편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사를 가도 자동으로 새로 이사된 주소로 배달이 되지 않습니다).  보통 한국사람이 살던 아파트에는 다음 입주자도 한국 사람으로 배정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누군가는 제 이름을 감사하게 기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사를 하고난 후 저는 더 이상 매달 우편함에 꽂혀 있는 검정 비닐에 쌓인 잡지를 아내 앞에서 쉬크하게 휴지통에 집어 넣는 퐁당 퍼포먼스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것도 5년 넘게 하던 일이라 가끔씩은 허전하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왜 플레이보이사에서 저에게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잡지를 무료로 보냈는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주변 사람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토록 오랫동안 잡지를 공짜로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잡지들은 일년마다 돈 내라고 청구서가 날아오는데 5년 동안 청구서 한장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 독특했던 경험이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경험인지라 한번 나누어 보고 싶었습니다.  너무 내용이 없는 에피소드라 짧을까봐 한국에서 있었던 일까지 얘기하였었는데 이렇게 길어졌네요.  ^^;;

그냥 외국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었다는 것.
오늘 얘기 끝!!

P.S. : 저는 과연 그 5년동안 첫번째 배달되어서 모르고 뜯은 것을 제외하고 단 한번도 검정 비닐을 뜯지 않았을까요?  이 기회를 빌어 솔직히 고백하자면 딱 두번 뜯어 보았었습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성 100인의 누드 특집이었을 때 한번 (1등이 마릴린 먼로더군요 ^^), 또 한번은 제가 정말 좋아하던 피겨 스케이터인 카타리나 비트의 누드가 실렸을 때 한번 이렇게였습니다.  5년 넘게 배달되는 동안 두번이라는 횟수는 수학으로 얘기하자면 0 에 수렴하는 횟수이니 저는 거의 한번도 안 뜯어보았다고 해도 되는 거죠?  ^^;;  그 내용이 실린 것은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은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흐흐흐...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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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트 역시 지나간 기억 더듬기의 하나입니다.  저에게는 잊을 수 없었던 일들을 하나씩 꺼내 돌이켜 보니 이런 저런 재밌는 일들이 많았네요.

저는 인구가 작은 대학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어바나라고 하는 도시와 샴페인이라고 하는 도시가 나란히 붙어 있는 쌍동이 도시에 삽니다.  도시 인구가 10만인데 대학 재학생이 5만에 달하다 보니 도시 인구 거의 전체가 대학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구가 작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노출이 되는 사회라 본의 아니게 사람 눈에 띄는 기회가 한국보다 훨씬 많습니다.  저는 한국 영화를 매우 사랑하는 일반 팬입니다.  미국에 와 있어 보니 한국 영화가 더 그립고 사실 애초에도 한국 영화를 참 좋아라 했었습니다.  물론 영화와 관련된 어떤 전문적인 일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한국에 있었을 때는 우연찮게도 영화와 연관되어 흥미로운 일에 연루된 적이 있긴 합니다.  당시 씨네 21의 커버 스토리가 되기도 한 이야기중의 하나도 연관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털어 놓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게 주제가 아니므로 패쓰. ^^;;

하여튼 이곳에서 살면서 영화 좋아하는게 티가 났는지, 아니면 제가 오지랍을 떠는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한국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종 저에게 연락이 옵니다. 그로 인해 몇가지 에피소드가 또 있는데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날 저에게 이메일로 아는 분께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미국인인데 저를 소개해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지 한국에 관한 거라면 오지랍을 떠는 제 성격 탓에 쾌히 그러마 저도 만나보고 싶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캠퍼스 내에서 그 미국인이라는 분을 만나뵈었는데 이곳 대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히 강사로써 한국 영화 및 아시아 영화에 관한 수업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일단 미국인이 한국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에서 호감이 있었던 저는 만나자마자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듯 죽이 많아 한국 영화를 주제로 엄청난 수다를 떨었습니다.  나중에는 한국 식당까지 옮겨가서 한국 음식을 함께 먹으며 그야말로 수다의 향연을 펼쳤습니다.  이 친구는 일반적인 미국인이 좋아하는 편안한 한국음식이 아닌 다소 강력한 비빔냉면이나 오징어 볶음등도 먹을 줄 아는 제대로 한국 음식 애호가였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제가 만나본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정말 모두)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의 힘이란 이런건가 봅니다.

그는 그동안 한국영화에 관한 나름대로의 소소한 궁금한 점에 관해 많은 질문을 해댔고 평소 한국의 연예 가쉽과 DP 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저는 수많은 대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제대로 답변을 들어서 좋았는지 정말 신나게 물어보았고 저도 정말 우쭐해서 무수한 대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서 토론다운 토론을 할 수 있었고 한국영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도 몇차례 개인적인 만남이 있었고 그의 집에 가보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의 탁월한 식견에 감탄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그가 영화배우 김윤석이 나중에 크게 뜰 거라는 예언을 했고 (그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배우였으며 그때 당시 김윤석은 조연 급으로 이름을 알려가는, 그야말로 일반 대중은 거의 모르던 그런 배우였습니다.  아마 엄태웅이랑 나왔던 드라마 부활 (알려주신 분 감사 ^^) 에서 강냉이를 먹는 반장으로 나올 때인 걸로 기억합니다.  그는 한국 드라마까지 섭렵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의 예언대로 김윤석은 지금은 뭐 확고부동한 위치를 갖춘 배우가 되었지요.  그야말로 인지도가 없던 시절의 김윤석씨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본 것이지요.

웹포토: 영화배우 김윤석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서는 저에게 몇가지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초기의 한국 영화를 구해달라는 부탁이 그거였었습니다.  하녀를 비롯한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물론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대라든지 신상옥, 유현목 감독등의 초기 한국 영화 자료들을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이곳 미국에서요.  아시다시피 지금은 이런 영화들이 정식으로 그래도 DVD 로 출간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불법 다운로드를 제외하고는 구할 길이 도저히 없더군요.   별수없이 암흑의 세계를 검색해야 했고 몇개는 구해서 그에게 건네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영어 자막이 구해지지가 않더군요.  그는 괜찮다라고 하면서 그것도 소중히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막 없이도 한국 영화를 보겠다는 그의 열정이 감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관계를 맺은지 한참이 지나 그에게 기쁨에 가득 차 있는 이메일을 한통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부산 국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와우..  미국의 소도시에 있는 주립대학교의 미국인 교수 (당시 그는 영화에 관한 강의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조교수라는 직함도 받게 되었습니다) 가 한국을 대표할만한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뭐 제일처럼 기뻤었고 그에게 농으로 이제 너는 장동건도 실물도 볼 수 있고 전도연도 김혜수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부럽다고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김윤석을 실제로 만나볼 수 있었는지는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못 물어보았군요.

그렇게 저의 친구는 부산 영화제에 다녀왔고 서로가 바빠서 그 후 이메일 교환도 못하고 연락도 못하고 지내다가 우연히 그의 모습이 담긴 기사 하나를 발견하고 저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기사입니다.  기사 캡춰화면이며 원문 링크는 여기입니다.

노컷뉴스 캡춰 화면이며 저작권은 노컷뉴스에 있습니다.


위의 기사에서 보시다시피 그는 한국에 가서 애초의 목적인 영화제 참관 및 강연은 물론 한국을 위해 스크린 쿼터 사수 1인 시위를 하고 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스크린 쿼터라는게 할리웃의 자본력에 대하여 한국 영화 시장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구책인만큼 대상국가인 미국의 그것도 미국인 영화 교수가 일인 시위를 했다는 것은 정말로 그때 화제가 되기 충분했었습니다.  영화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 중에는 혹시 이 분을 기억하는 분도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은 저의 자랑스러운 친구 Robert Cagle 교수를 여러분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 산다는 것은 이렇게 가끔 놀라움을 던져주어 지루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P.S. : 위의 기사중의 사진과 캡션을 보시면 미국 어바나 샴페인대 영화학과 교수라고 되어 있는데 그런 학교는 이곳에 없습니다. ㅎㅎㅎ  일리노이 대학 어바나-샴페인이어야 맞지요. 

웹포토 출처: 
http://extmovie.com/zbxe/movietalk/783165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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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가 지난번에 쓴 미국 초등학교에서 행한 한국에 관한 특강 글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못 읽으신 분을 위해 간단히 첨언하자면 미국 3학년 교실에 가서 한국에 관한 특강을 했었습니다).  말씀 드렸던 것처럼 미국 학생들의 반응도 너무 좋았고 미국 초등학생들에게 적은 수나마 한국을 알렸던게 정말 가슴 뿌듯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2탄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물론 한참전 이야기입니다.


한국 특강 행사의 열렬한 반응에 탄력을 받은 저의 아내가 자발적으로 한가지 일을 더 기획을 했습니다.  한국 특강 행사에서 아내도 한복을 차려 입고 아이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함께 지켜보았었거든요.  바로 3학년 학생 전체에게 점심으로 한국 음식을 해 주는게 어떻느냐는 의견이었습니다.  제가 행한 강연 후에 한국에서 온 과자(쵸쿄파이)랑 전통 유과를 맛있게 먹던 그들이 떠올라서였습니다.  3학년 다른 한국 학부형님들과 상의가 진행이 되었지만 혹시라도 한국 음식을 잘 못먹고 탈이라도 나면 소송감이라는 우려를 제시해준 분이 계셔서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서는 음식에 알러지가 있는 친구들도 있고 까다롭게 음식을 먹이는 사람들이 많아 잘못하면 법정소송까지 가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들 녀석의 담임 선생님인 Mrs. Frost 와 상의했더니 의외로 대단히 반색을 하셔서 결국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상도 아들 반뿐만 아니라 옆 반인 Mrs. Unzicker 의 반까지 포함을 하는,3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 음신 잔치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사립학교에 다녔었는데 한 학년에 반이 두개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정 통신문을 통하여 Korean Food Lunch 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3학년 모든 학생들의 학부형들에게 통보를 하였고 혹시라도 꺼리는 부모가 있으면 선생님께 알리고 그 날은 도시락을 따로 싸올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학생들이 지하에 있는 큰 식당에 내려가 싸온 도시락을 먹거나 미리 돈을 납부한 학교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습니다 (미리 한학기치 식단이 나와서 아이들이 안 좋아하는 메뉴일 때는 도시락을 싸가고 미리 신청한 점심에 한해서만 돈을 지불합니다).

 

결국 그 한국 음식 잔치가 아들 녀석의 교실에서 성대하게 거행이 되었습니다.  같은 학년인 한국아이 4명의 어머니들 혹은 이모 되시는 분 (어머니가 한국에 계신 경우) 김밥, 불고기, 잡채, 하얀 쌀밥, 만두를 두 학급 분을 함께 준비하여 써빙을 하였습니다.  하얀 쌀밥의 경우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 아내가 과거에 경험한 바로는 아이들이 맨 하얀 쌀밥을 무척 잘 먹었기 때문에 메뉴에 집어 넣기로 하였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쌀밥 먹는 방법은 매우 독특합니다.  쌀밥에 그냥 그 위에 간장을 뿌려서 먹습니다 ^^).


혹시라도 아이들이 한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생길까봐 김치를 비롯한 매운 음식은 일체 넣지를 않았습니다.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매운 음식을 더 잘 못먹거든요.

 

가장 인기를 끈 품목은 의외로 하얀 쌀밥과 만두였습니다.  하얀 쌀밥은 가져간 양이 일찍 동나버려 아쉽게도 조금 모자라게 되었고 냉동 만두를 튀겨간 만두의 경우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불고기와 잡채도 인기가 있었고 김 때문인지 김밥이 다소 인기가 적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아이들은 김의 입안에 들어가서 끈적하게 되는 느낌을 참 싫어한 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른은 좀 다릅니다).  이날 두반의 담임 선생님도 함께 식사를 하였고 마침 교실을 지나가시는 교무실 직원분들도 함께 맛을 보는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반응은 정말이지 너무나 뜨거웠었습니다.  하얀 쌀밥을 반찬도 없이 그 자체로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면 이색적이기도 하지만 음 역시 한국식 식사가 제일인지 너희들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었답니다.^^

 

한가지 너무나 감동스러운 일은 미국 아이들이 서투른 한국말이지만 한국말을 미리 한국학생에게 배워서 "고맙습니다"  혹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얀 종이에 적어서 영어로 감사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이날 써빙을 하신 4명의 한국 어머니 혹은 이모님에게 전달을 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도 한글로 배워서 적어낸 학생도 있었습니다. "데니얼" 이런 식으로 한글로 써서 말입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받았다고 집에 카드를 여러장 (4분의 어머니들께 골고루 아이들이 드렸다고) 들고 왔는데 카드에 써있는 미국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쓴 한글 메시지를 보니 가슴이 뜨거워지더군요.  대단한 정성을 들였는지 제법 알아볼 수 있게 잘 썼더군요.  그야말로 한글을 한자 한자 정성들여 그렸더군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블로깅을 열심히 하는 시대였다면 이 카드들도 스캔해서 보관해 놓았을텐데 지금은 아쉽게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네요. ^^;;

 

잠깐의 아이디어로 행한 즉홍적인 행사였지만 이 또한 한국을 알리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반 담임 선생님께서도 너무나 맛있게 한국음식을 드셨고 자칭 중국 음식 팬이라는 아들의 담임인 Mrs. Frost 의 경우는 김밥이랑 불고기 레서피를 달라고 아내에게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아내가 시립도서관에 가서 영어로 된 한국음식 요리책을 빌려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요리책안의 내용들이 너무 복잡하게 쓰여 있어 결국 아내가 본인의 레서피를 영어로 적어 주게 되었습니다).

 

여러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아무 거부감 없이 진솔하게 받아들이려는 미국 초등학생들의 열린 자세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 진지하게 강연이나 한국 음식 잔치 모두 참여하였고 참여한 저나 아내를 너무 행복하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받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의 가정 통신문에는 한국 음식 잔치를 대성황리에 마쳤고 무척 맛있었으며 여러분 자녀에게 어땠었는지 물어보라는 세심한 배려가 담긴 선생님이 쓰신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학부형들에게 행사 보고를 한 것이고 학부형들의 평을 여쭌 것이지요.  불과 총인원 45명 남짓한 사람들에게 대접한 한국 음식이지만 이 45명에게 끼친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이 다른 미국 사람들에게 널리 널리 퍼져나가게 되기를 참 바랬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이 한국 음식 행사에 바쁜데도 불구하고 성심성의껏 정성을 다해 같이 한국 음식을 준비해주신 3분의 어머니와 한분의 이모님께도 참 감사했었습니다.  사실 만약 미국 학부형들하고 함께 였다면 각자의 스케쥴 맞추느라 이런 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음식 행사가 결정되자마자 한국 분들은 그야말로 다른 모든 일을 취소하고 이 일을 함께 해주셨었습니다.  잘 뭉치고 희생하는 그야말로 한국인 정신을 발휘했었지요.  그날만큼은 정말 문자 그대로 다들 민간 외교관이셨으니까요.


이제는 그 때 한국 음식을 맛본 아이들이 다 커서 어쩌면 기억도 안나는 이벤트일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그들이 한국과 관련된 일을 접했을 때 조금이라도 기억을 떠올리는 그런 행사였기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 기회를 빌어 한번 바래 봅니다.

P.S. : 이 날 행사로 아내는 아이들이 하얀 쌀밥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되었고 앙콜 겸 3탄의 행사로 도시락처럼 귀여운 토끼 주먹밥을 만들어서 학교로 보내서 아이들이 나누어 먹게 했답니다. 물론 아이들은 맛도 있고 모양도 독특한 음식을 참 좋아했지요.  미국은 이런 귀여운 음식이 없답니다. ^^  위의 행사에 사진이 전혀 없어서 3탄의 음식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아래 주먹밥의 귀는 당근으로 눈은 흑깨로 만든 거랍니다.  가끔 삐뚤거리는 눈과 귀가 있는데 이는 저희 아이들이 참여해서 그렇습니다.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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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성이나 그렇듯이 예쁜 여성, 그것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미모를 자랑하는 여성과의 만남은 무척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저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서 미스코리아 진이 딱 한번 나온 적이 있는데 (1985년 미스코리아 진 배영란) 마침 이분이 저랑 동갑이고 저의 아버지 지인의 딸인지라 철없는 대학시절 아버지를 졸라 한번 급만남을 부탁드린 적이 있는데 (그것도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힌 해에 ^^) 역시 미스코리아 진은 만나기 힘든 사람이구나 하는 통념만 확인하고 쓸쓸하게 오늘까지 그 모습을 방송이나 신문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1988년 미스 올림픽 진으로 뽑힌 분 (88 올림픽 개회식에서 첫 깃발을 들고 들어오신 분) 을 다른 장소도 아닌 저의 자취 집으로 이분이 놀러 오셔서 뵙는 행운이 생겼지만 그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패스 ^^;;

그런데 한국보다 더 큰 이곳 미국에 와서 미스 아메리카, 그것도 진을 만난 멋진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입니다.  좀 시간이 지난 글이긴 하지만 함께 재미있게 읽어주시리라고 믿고 올립니다.  ^^;;

저의 아들과 딸이 다니는  학교 (이전글  미국 초등학교에서 행한 한국에 관한 특강을 했던 그곳) 에서 학교 창립 20주년 기념 연회가 있다고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사실 미국에 와있는 한국 부모들은 이러한 학교 행사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바가 적은 편이라 나름 평소에 이 지역사회의 기관들이나 학교들이 항상 한국인들의 사회 참여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던 저희 부부는 학교 혹은 사회 행사에는 빼놓지 않고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차라 당연히 참석을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미국 지역 사회 참여가 많이 부족한 것은 참여의식이 부족하기보다는 아무래도 언어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막상 참여를 하여도 크게 흥미롭지 않거나 몸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한 경우가 많아서 그런게 아닌가 하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저희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20주년 기념 연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이 연회에 특별 연사로 초청된 사람이 바로 그해 막 뽑힌 미스 아메리카 진 에리카 해롤드 (Erika Harold) 양과 그의 부모들이었습니다.  에리카 해롤드 양이 저희 자녀가 다니는 학교를 다녔었기 때문입니다.  연회중에 들어 보니 20주년 기념 연회 날짜 역시 에리카 해롤드양의 스케쥴에 맞추어서 결정되었을 정도로 매우 바쁘게 활동하는 듯 하였습니다.  특히 이때가 미스 아메리카로 뽑히고 난 직후라 다른 어느때보다도 그녀에게는 바쁜 때였었거든요.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미스 USA 와 미스 America 의 차이를 아시나요?  전자는 여러분들이 상상하시는 그야말로 미모와 몸메에 있어 최고의 여성을 뽑는 대회이며 후자는 대학에 재학하는 학생 이상으로 범위를 제한하여 미모와 지성을 함께 갖춘 여성을 뽑는 대회로서 대회 상금 역시 장학금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수영복 심사 이상으로 과거의 활동 경력이나 학력, 그리고 대회에서의 연설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미스 아메리카도 시작은 미인대회로 했으나 이렇게 지성을 중요시하게 보는 대회로 발전을 하게 됨으로써 미스 USA 와 차별을 두게 된 것이지요.  상금이 장학금으로 주어지고 응모자들이 대개 대학 재학생 이상이므로 상금은 주로 대학원, 의대, 법대, 특수 직업 학교등의 등록금등으로 씌어지게 됩니다.  한국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여배우 산드라 블록이 수사관으로 분하여 미인대회의 테러 소식에 미인대회 참가자로 분하여 엉뚱하게 상을 받게 된다는 영화 Miss Congeniality 의 무대가 바로 미스 아메리카 대회였습니다.  당시 산드라 블록이 미인대회 상을 받는 다는게 납득이 안가 영화가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는 분들이 계셨었는데 이는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
 
어쨌든 2003년 미스 아메리카 진인 에리카 해롤드양은 이 대회에 출전할 때 이미 하바드 법대에 입학 허가를 받은 상태였으며 이 대회에서 우승함으로 말미암아 7만 5천불의 장학금 이외에도 하바드 법대의 수업료 전액 (15만불) 을 제공받게 되더군요.
 
미스 아메리카의 극적인 진 결정 장면이 장내에 비디오로 화려하게 펼쳐지고 나서 등장한 그녀는 매우 우아했으며 미스 아메리카로 결정되는 순간에 너무 오랫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던게 매우 후회스럽다는 농담로 그녀의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 나온 거의 모든 매스컴이 그녀의 커다란 입이 가득찬 사진만을 실었었기 때문입니다. ^^
 
그녀의 연설은 예상대로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다 옮길 수는 없지만 그녀의 신념과 믿음에 대한 연설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냈을만큼 감동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부모님의 연설 또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에리카 해롤드양의 어머니는 흑인이며 아버지는 중동계 백인인듯 하였습니다.  그녀도 매우 아름
다웠으며 이날 함께 온 그녀의 여동생도 대단한 미인이더군요. ^^  뭐랄까 그동안 제가 아름다운 여성들을 제법 만나보았으나 지적인 후광에 있어서는 에리카양이 기억에 남을만큼 멋지더군요 (물론 미스 아메리카 진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했을거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
 

Miss America 2003 Erika Harold


그녀는 연설중에 잊지 못할 선생님으로 딱 한분을 언급하였었는데 그 선생님은 다름아닌 그때 제 아들의 담임 선생님인 Mrs. Pridemore 여서 저희 가족에게는더욱 특별한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연회 행사가 끝나고 나서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에리카와 잠시나마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순서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럴때면 언제나 잽싸게 행동하는 저 때문에 저희 가족은 가장 먼저 에리카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  이런 거물급 인사를 만나본 저의 경험으로는 만남의 순간이 마련되는 순간 가장 빨리 움직여야 기다림도 없고 좀 더 여유있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저만의 팁이 이날도 먹혀들었던 것이었습니다. ^^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에리카에게 제가 먼저 인사를 걸었고 '현재 나의 아들의 담임이 니가 말한 미세스 프라이드모어야' 라고 얘기를 꺼냄으로써 대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에리카는 그녀 특유의 무척 환한 미소로 약간 놀란듯한 표정으로 아들 녀석에게 말을 걸어 주었습니다. 

"너 혹시 A- 받은 것 없니?" 

그녀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는데 이는 그녀가 연설중에 선생님이었던 미세스 프라이드모어에게 과학 프로젝트에서 유일하게 A- 를 받았던 에피소드를 빗대어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화산이 분출되는 작품을 만들었었는데 터지기만 하면 A 를 맞을 수 있었던 프로젝트가 화산이 터지지 않는 바람에 A 를 받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미세스 프라이드모어에게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전 과목을 A 혹은 A+ 를 받았던 그녀에게 그게 그렇게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었나 봅니다.  ^^
 
이 때 아들 녀석과 대화를 나누던 모습을 옆에서 찍은 것 한장 보시겠습니다.  이백만 화소 디카시절이라 사진 퀄리티는 빼고 내용만 봐 주십시오.
 

 
아들 녀석은 수줍게 몇마디를 더 주고 받었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탓에 우선 서둘러 사진 몇장을 함께 찍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에리카에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미스 아메리카를 만났다는 것을 아마 못 믿을 거다 라고 얘기를 했더니 그녀는 "그럼 이 싸인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며 기대하지 않았던 싸인을 두장이나 해주었습니다.  사실 유명인을 만날 때 싸인보다 사진이 효과적이었던 경험이 있던지라 싸인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얼떨결에 원치않는(^^) 싸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아들 녀석에게 싸인을 해주는 에리카의 모습입니다.
 



그녀는 미스 아메리카에 걸맞는 품위가 있었고 무척이나 우아했었습니다.  그녀와 만난 후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제법 오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키가 크고 아름다운 흑인 여성이었습니다.  지구 저 반대쪽에서도 에리카를 알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우리 한국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던 저의 요청에 진심으로 감동해 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도 못 만나 보았던 한 나라를 대표하는 미인을 만나보았습니다. ^^ 다른 미인대회 우승자와는 또 다른, 미모와 지성을 함께 겸비한 여성을 만날 수 있어서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나 친절히 대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대화를 나누던 그녀에게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우아함도 느꼈었구요.



지금도 제가 사는 동네 가장 큰 길가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제가 사는 이 도시의 큰 자랑입니다.

어바나시, 인구 37,362 명, 미스 아메리카 2003 의 고향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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