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 또 어느 영화인이 요절하였는가 놀라셨을 분도 계시겠지만 글 머리에 '회고'라고 썼듯이 지금부터 들려드리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제가 잘 아는 영화인의 이야기입니다.  문득 그 분 생각이 나서 이전에 메모해 두었던 글을 보고 그리움에 몇자 적어보는 글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글이지만 제 이야기를 항상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듯이 저는 영화, 그것도 한국영화의 대단한 팬입니다. 아마도 제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더욱 더 한국영화에 대한 애착이 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야말로 초등학교 시절) 부터 대단히 많은 수의 잡지를 보고 자랐는데 제가 태어나서 처음 보게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잡지도 영화 잡지였습니다 (그전에 보던 잡지들은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 이런 초등학생들을 위한 잡지였습니다).  

제가 최초로 본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는 바로 일본에서 발행하는 "스크린" 과 "로드쇼" 라는 영화 잡지였는데 당시에는 이 잡지를 지금은 사라진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뒤의 중국 대사관 근처의 외국 간행물 파는 서점에서만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서점들은 제가 가장 마지막에 한국을 갔을 때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지방에 살던 저는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을 올라와 고속 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한시간 정도를 가야만 이 잡지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가 1977-78년이니 정말 까마득한 옛날이군요.  초등학교 5-6학년 때였으니..  

덕분에 이 잡지를 읽으려고 일본어 중 가타카나를 공부하기도 했었으니 좋은 영향이 되기도 했군요 (두 잡지 모두 외국 영화에 대해 더 비중있게 다루어서 일본어로 외국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를 알아야지만 외국 배우 이름이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에는 한국어로 된 영화 잡지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지만요 (제 기억에 이때 발행된 한국 영화 잡지 이름도 스크린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먹어 결혼을 하고 직장 때문에 수원에 살게 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는 교회 모임을 통하여 재야(?)의 영화 감독 한분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충무로식 표현으로 하자면 아직 입봉(주: 첫 개봉극장 상영용 영화를 만들어 데뷰하는 것) 을 못한 감독이었습니다.  영화 아카데미 출신에다가 동기들이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막 뜨기 시작한 분이셨으나 본인의 건강상의 이유로 입봉을 못하고 혼자 준비를 하던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특히 씨나리오를 직접 쓰는 분으로서 많은 작품들에 관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시놉시스(주: 대략의 영화 줄거리들만 기술한 짧은 스토리북) 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왕성하게 씨나리오 작업을 하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참새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듯이 영화에 관심 많은 제가 가만 있을리 있나요?  만나기만 하면 모임의 주제 이야기보다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이분의 새로운 씨나리오가 탈고 되면 제일 먼저 받아서 읽어 보고 관객의 입장에서 제 의견을 얘기해 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제가 더 많이 했던 작업은 이 분이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때마다 해결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분은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여관 옥상의 옥탑방에서 혼자 살고 계셨는데 씨나리오를 집필할 때에는 한글 워드 프로세서 아래아한글 1.52 버젼으로 작업을 하실 때였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안정적일 때가 아니어서 이런 저런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면 언제나 5-10분내로 달려가서 직접 해결을 해드리곤 했었습니다.  저를 만나기전까지는 줄을 바꿀때마다 엔터키를 누르시고 들여쓰기를 할때면 스페이스바를 눌러서 밀어쓰던 습관으로 인하여 대본 수정시마다 정렬에 애를 먹던 것을 Shift-Tab 을 이용한 들여쓰기 및 몇가지 팁으로 이분을 신세계로 인도해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야 제가 대한민국에서 아래아한글을 제일 잘 다룬다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모임인 한/글/사랑회의 회원으로 뽑힐만큼 HWP 를 심각하게 쓰던 시기라 그분에게 유용한 많은 팁을 전수해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즘 유행이라는 깔대기(잘난체? ^^) 한번 들이대 보았습니다).  

또 운영체제 문제 해결 및 컴퓨터 수리 10분 대기조로 활약하면서 컴퓨터 고치는데 10분, 영화 얘기 하는데 몇시간 이상을 떠들었던 기억이 새록 새록 납니다.  이 때 신혼이었던 아내는 전화를 받고 컴퓨터만 고치러 가면 돌아오지 않는 남편 덕에 아예 초저녁에 A/S 를 뛰러가면 혼자 일찍 잠을 청하기도 하였었습니다. ^^;;
 
그러다가 한번은 이 분이 만드시는 단편 영화에 참가하여 엑스트라로 출연하기까지 하는 재미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작비가 엄청 부족한 단편 영화의 경우 (대개 만드는 사람이 모든 비용을 부담) 어떨 때는 스텝과 배우의 경계가 모호하기도 했으며 제작 환경이 아주 열악해서 지하철에서 비가 내리는 창가에 앉아있는 주인공의 씬을 찍기 위해 연출부 역할을 하는 몇명이 1.5 리터 PET 병 서너개에 물을 넣어서 배우가 앉아있는 앞쪽 창문으로 가서 손을 밖으로 내밀고 페트병으로 물을 뿌리면서 비오는 효과를 내기도 하였었습니다.  

사전허가를 받지 못해 이러한 일들을 몰래 하기도 했었고 1분도 안되는 이 씬 (scene) 하나를 찍기 위해 수원-서울역간을 두번 왔다 갔다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때 알게된 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영화에 대한 센스가 엄청 뛰어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하철 칸에 있는 모든 일반 승객들이 영화를 찍는다고 영화를 찍는 카메라 쪽으로 부자연스럽게 쳐다보지 않고 지하철 승객처럼 다들 훌륭하게 각자 연기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  심지어 어떤 승객 분들은 감독의 컷 소리가 나고 나면 자기 연기가 부자연스럽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하셔서 저를 웃게 했습니다.  그 분은 카메라 앵글 반대편에 계셔서 영화에 나오실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  

그때 저는 주인공이 지하철안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옆에서 혀를 끌끌차면서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지하철 승객 1 역을 했었는데 주변에서 연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 다만 얼굴이 커서 화면이 꽉차는 대형 스타였다는 소리도 함께 들어야 했습니다만...
 
당시 이 분이 단편 영화를 찍었던 이유는 단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을 경우 자본 투자를 받아서 충무로에서 머리를 올릴 수 있는 챤스를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잘 아는 방송작가분들이 TV 드라마를 쓸 때 몇몇 장면에서 대사를 구성해 드린 경험 밖에 없는 저로서는 영화 제작 현장에 이렇게 직접 참여하는 일이나 대본을 미리 읽어 보고 검토하는 일은 무척 흥미롭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분은 신부전으로 인하여 일주일에 한번 내지 두번은 온 몸의 피를 걸러내는 신장 투석을 받으로 병원에 다니는 힘겨운 삶을 살고 계셨지만 항상 긍정적이고 밝으시며 왕성하게 영화 활동을 (비록 소규모 단편영화들이었지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장 문제로 까맣게 타버린 이 분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그 푸석푸석하던 피부도 이분의 아름다운 미소를 감추게 할 수는 없었거든요.  영화를 촬영하고 나면 함께 했던 모든 분들이 이 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에 모여서 소주에 김치 안주로 뒷풀이를 하는 광경들이 아직도 선합니다.
 
제가 미국에 온 이후에도 인연은 이어져서 이메일로 대본이 날라오면 제가 읽고 저의 의견을 다시 이메일로 보내고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대본 하나는 제대로 된 느낌으로 읽어보라고 항공 우편으로 보내 주기도도 하셨었습니다.  그 중 기뻤었던 하나는 그 분의 씨나리오가 문성근씨가 운영하는 영화사에서 주최하는 씨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그 분 감독하에 제작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씨나리오가 저에게 우편으로 보내준 그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있으셨던 걸까요? 이 후에 그 분께서는 주연으로 당시 인기가 있었던 여명과 김희선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메일을 보내와  저를 더욱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소식이 뜸해지고 저도 미국에서의 제 앞가림에 여념이 없어서 연락이 끊긴게 한 2년쯤 되었을까요?
 
2003년 어느날 인터넷 판 C 일보 기사에서 저의 눈을 잡아 끄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어느 젊은 영화인의 죽음" 이었습니다.  끝내 꿈을 피우지 못하고 삶을 접어 버린, 한 전도 유망한 실명을 밝히지 않은 젊은 영화 감독의 주목을 끌지 못한 죽음 이야기였습니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고 그 젊은 영화인의 사인이 신장 관련 질환이라는게 더욱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곧바로 기사 게시판에 답글을 올렸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혹시 돌아가신 그 젊은 영화인의 성이 '민'가가 아니냐구요. 하루 후에 게시판에 글을 작성한 기자로부터 다시 받은 답글은 '민'가가 맞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에이 그래도 민씨가 얼마나 많은데...  게시판에 그 분의 실명을 공개하기가 꺼려져서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누가 되는 질문입니까?) 기자의 개인 이메일로 돌아가신 그 분의 성함이 '민병관' 감독님이 맞느냐고 재차 여쭈었습니다.  이틀 정도가 지난 후에 돌아온 이메일은 안타깝게도 정확히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못다 핀 꽃 한송이'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습니다.  99년인가 씨네 21 영화 잡지에 컬러 특집 커버 기사로 '충무로의 그늘, 민병관' 이라는 전면 기사 (충무로에서 역량있는 젊은 감독이 얼마나 크기 힘들다는 것을 그 분의 예로 기획했던 특집 기사였습니다)가 나올 때만 해도 오히려 저는 이제 그 분이 피나보다 라고 희망을 가졌었고 씨나리오 대상을 받았을 때 이제 곧 히트 감독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장미빛 꿈을 꾸었었는데 말입니다 (그 특집의 일부기사는 씨네 21의 링크 가깝고도 먼 충무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이름을 확인 시켜 준 그 C 일보 객원 기자분의 글에는 민 감독님의 씨나리오가 그의 영화 아카데미 동기인 장현수 감독을 통해서 곧 영화화 될 것이라는 소식도 실려있었습니다.  다른 동기 감독들의 추모글을 통해 보니 민감독님이 영화 아카데미 시절 가장 주목 받았던 분 중의 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더군요.  결국 민 감독님은 돌아가신 후에 입봉 아닌 입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었던 씨나리오 "엔터" 가 바로 당시에 영화화 되기로 했던 작품입니다.  그 후에 그분의 씨나리오들이 어떻게 영화화 되었는지에 관한 정보는 현재 저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돌아가신 그 분의 이름 석자가 크레딧에 올라와 있는 작품이 존재하기를 간절하게 빌어봅니다.

오랫만에 검색을 통해 위의 씨네 21 링크에서 보게 된 고 민병관 감독님의 사진 때문에 이 저녁 제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고 울리는 군요.  당시 이 씨네 21 잡지를 한국에 부탁하여 받아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절친한 지인에게 꼭 이 감독님의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빌려주었더니 나중에 그냥 주간지인줄 알고 버렸다고 하여 제가 굉장히 속상했던 기억도 함께 나는 군요.  제가 평생 만나본 분들 중에 가장 착하고 겸손하고 예의가 있었던 사람 5분만 꼽으라면 그 중에 들어갈만큼 사람 좋고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정열적이셨던 바로 그 분 고 민병관 감독님을 오늘 추억해 봅니다.

언젠가 그의 이름이 담긴 영화 크레딧을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어느 한분이라도 보고 그분을 기억하게 되신다면 아마도 그게 제가 고 민병관 감독님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지나간 기사를 찾기 위해 '어느 젊은 영화인의 죽음' 으로 검색했을 때 등장했던 미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가신 또 다른 많은 젊은 영화인들을 이 순간 또한 기려 봅니다.

민 감독님, 보고 싶네요. 다시 뵙게 되겠지요?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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