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국에서 만13살이었을 때는 중학교 2학년이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하면 초등학교(국민학교)를 갓 벗어난 아주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 딸아이는 같은 나이에 본의 아니게 고등학생이 되어버렸습니다.


미국의 고등학교 시스템을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4년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9학년을 freshman, 10학년을 sophomore, 11학년을 junior 그리고 12학년을 senior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번에 딸아이가 입학하게 된 공립학교는 freshman 아래에 subbie (써비) 라고 부르는 sub-freshman 이 하나 더 있습니다.  즉 5년짜리 고등학교가 되는 셈이지요.  이름도 University Laboratory High School 이라고 약칭 유니하이(Uni High) 라고 부르는, 한국식으로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일리노이 주립대학 부속 고등학교' 이니 고등학교가 맞습니다만 월반은 아니고 1년이 더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셈이지요. ^^


University Laboratory High SchoolUni High 전경 - 뒷쪽 유리건물이 아빠가 공부하던 Siebel Center ^^


그동안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SSAT (Secondary School Admission Test) 라고 미국에서 대학을 가기 위한 입시시험으로 유명한 SAT 의 전단계 버젼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시험을 따로 치루고 응시하여 이 공립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SSAT 와 SAT 는 주관사가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딸아이 자신이 학교 분위기가 바뀌기를 원했고 여러모로 많은 혜택과 기회가 있는 학교로 유명한 곳인만큼 지원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는 저희 내외가 말리지 않았으나 입학이 가능하리라고는 정말 꿈엔들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지원원서도 들여다 본 적이 없고 지원서에 써야 하는 6개인가의 에세이를 구경조차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혼자 힘으로 지원해서 그래도 나름 경쟁률이 높다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오히려 우리 부부가 딸아이를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딸아이는 특별한 면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거든요.  심지어 SSAT 점수조차도 이 학교에 지원하는 날고 기는 학생들에 비해서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우리 부부는 도대체 학교에서 이 아이의 어떤 면을 보고 뽑았을까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


제가 학위를 받은 학과 건물이 위의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바로 Uni High 옆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어서 그 옆을 10년을 넘게 지나치면서도 단 한번도 내 자녀가 이 학교의 학생이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작은 도시에 방문해 주시는 분들이 계실 때마다 학교 투어의 일환으로 이 학교를 소개해 본 적이 있을 뿐이니까요.  보통 한 나라에서도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 나오기가 그리 쉽지 않은데 이 작은 도시의 공립 고등학교에서 노벨 의학상, 경제학상 및 물리학상 등 3명의 수상자가 나온 데다가 퓰리쳐상 수상자까지 배출했으니 명문 고등학교에 관심이 많지 않은 한국에서 오신 지인들에게조차 이 학교를 소개할 때마다 '오~~' 하는 탄성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유니 하이는 학생수 대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딸 아이는 이 학교의 '써비'가 되어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공립이니 수업료도 없고 (하지만 학교 재정 탓에 학부모님들에게 일정 금액 이상의 기부를 권유하긴 합니다 ^^) 일리노이 대학과 연계되어 있는 탓에 학교의 도서관 및 각종 시설들도 이용이 가능하고 심지어 이 대학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학생들과 이메일 주소도 같습니다.  즉 @illinois.edu 라는 이메일 계정을 소유하게 된 것이지요.  어느면에서는 아빠와 동문이 된 것입니다.


일전에 이 블로그의 '미스 아메리카 진을 만나다' 글에서 소개해드렸던 이 동네에서 유일한 미스 아메리카로 뽑힌 에리카 해롤드 (Erika Harold) 양과는 이제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도 동문이 된 셈입니다.  딸아이와 에리카 양이 함께 만나서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말입니다.


에리카 해롤드와 함께 한 딸아이


이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딸아이는 새로 바뀐 학교 분위기와 친구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물론 모든 신입생들에게 최신형 ThinkPad 노트북이 전원에게 한대씩 무료로 지급되어 더욱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가 없는 딸아이에게 본인 전용의 노트북을 하나 사줄까 고려하고 있던 저로서는 큰 돈 굳은 셈이 되어서 얼마나 가계에 보탬이 되는지 모릅니다.  ^^


어린나이에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것, 많은 우수한 아이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 좀 안쓰럽기도 하지만 Class of 2018 (미국에서는 동기동창을 이렇게 졸업연도로 호칭합니다) 의 유일한 한국인이 된 딸아이가 고등학교 생활을 멋지게 잘 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아마도 2013년에 일어난 저희 가족에게 가장 놀라운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딸아이가 유명한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과 고교 동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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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몇가지 개인적인 일로 영 블로깅을 등한시 하다가 생존신고 목적으로 예전에 써둔 글이지만 올려봅니다. ^^;;  지금이야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는게 그렇게까지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니지만 (이 글을 쓴 이후에 제가 일했었던 건물에서도 노벨상이 한명 나왔었거든요) 글을 쓸 당시만 해도 제게는 굉장히 흥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의 추억을 저도 잠시 떠올리며 시간이 한참 지난 글이지만 약간 각색을 해서 올립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겪는 큰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제가 만났던 소위 유명인이라면 아무래도 연예계나 스포츠쪽이 많았는데 제가 참여했던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학회에서 만났던 유명인은 색다르게도 노벨상 수상자들이었습니다. 그중 석사나 박사 학위 전혀 없이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노벨상을 받아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일본의 다나까 고이찌씨를 직접 만난 얘기를 짧게 적어 보려고 합니다. 

당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학회를 떠나기 몇달전부터 저의 관심은 제가 발표할 포스터 (학회에서는 자기가 한 연구를 포스터로 만들어 붙여놓고 그 앞에 서서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과 답변을 하는데 이를 포스터라고 그냥 부릅니다) 가 아닌 이 학회에 참석하게 될 전년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 다나까 고이찌였습니다. 이번 학회에는 다나까 고이찌 외에도 함께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버지니어 커먼웰쓰 대학의 죤 펜도 참가하여 기념 강연도 할 예정이었으나 저의 관심은 다나까에게 훨씬 더 쏠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그의 전력이 이채로웠고 이 글을 쓰기 몇달전에 KBS 에서 방영한 일본 NHK 에서 제작한 그에 관한 특별 다큐멘터리를 본 탓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큰 학회이다 보니 과연 그를 개인적으로 대면할 찬스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마음 한편에서는 그를 꼭 만나고야 말리라 하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 

몬트리얼에는 토요일날 도착을 했고 월요일부터 학회의 정식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를 어깨너머나마 보려면 이틀이나 기다렸어야 했지만 의외로 그를 볼 수 있는 첫번째 찬스는 빨리 찾아왔습니다. 바로 도착 당일 토요일 저녁에 다나까 고이찌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인 시마즈(Shimadzu) 제작소에서 주최하는 만찬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찌기 이 행사에 등록을 해놓았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물론 시마즈의 간판 스타인 다나까가 참석하리라는 기대도 할 수 있었구요. 하지만 낯선 도시이자 첫번째 온 몬트리올의 첫날밤을 리셉션장에 딱딱하게 앉아 있기가 왠지 싫었습니다. 그래서 시마즈에서 주최하는 리셉션 대신 같이 간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몬트리얼의 다운타운으로 나갔습니다. 왠지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가 그에 대한 기대보다 더 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결국 길거리에서 수많은 유럽풍의 미녀를 보면서 이 선택에 아주 만족했었고 이날 저녁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여성들보다 더 아름다웠던 분들에 대한 이국에서의 추억은 직접 만나서 들려드릴 안주거리로 남겨놓겠습니다. ^^).

tanaka그의 연구소에서 - 다나까 고이찌



다음날 아침 일찍 만난, 전날 시마즈 리셉션에 참석했던 두명의 연구실 동료들로부터 다나까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두명의 미국 여성 동료들은 그에 대해 매우 언짢아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나까가 짧게 강연을 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하도 사진을 찍어대자 그는 연설을 무려 4-5번씩이나 도중에 중단하면서 "나는 유명 연예인이 아닙니다 (I am not a rock star)" 를 거푸 강조하였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동료들에게는 연설을 중단하면서 그렇게 내보였던 반응들이 짜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내심 그를 직접 만나게 되면 이런 얘기를 해줘야겠구나 라는 말도 안되는 건방진 생각을 당시에는 했었습니다.  ^^

그를 드디어 대면하게 된 것은 바로 학회 첫날 월요일이었습니다. 혼자 이리 저리 발표된 다른 연구원들의 포스터들을 보러 우왕 좌왕 돌아 다니다가 바로 옆에 3명의 회사 동료와 함께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다나까 고이찌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찬스를 그냥 흘려보낼 사람이 아닙니다. ^^  그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다가서서 인사를 했습니다.  첫인사는 일부러 일본어로 했습니다.  그래봐야 "곤니찌와, 다나까상" 이지만 말입니다. ^^ 

의외로 차분하게 그는 자연스럽게 저의 접근을 받아주었고 그 이후로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왔다 갔다 했지만 의외로 저와 다나까 고이찌의 대화는 별로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한국에서 왔고 미국에서 관련분야의 공부를 하고 있다고 소개를 했더니 바로 다나까 고이찌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한국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허걱... 곧바로 저는 어떻게 한국말을 아냐고 여쭈어 보았고 그는 이깟 외국어 한 문장 외우는게 뭐가 어렵겠냐는 대답을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그의 대답에 잠시 멍하긴 했지만 노벨상 수상자로부터 듣는 한국 인사는 솔직히 조금 각별했다는게 당시의 저의 느낌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한류 이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던 때이고 한국말을 한마디라도 아는 일본인을 학회에서 만나기란 코엑스에서 제시카 알바를 만나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곧바로 정중하게 사진 촬영을 요청했으나 역시 예상했던 대로 정중하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사실 말투는 정중하긴 했으나 일본 사람들이 부정을 표시할 때 완곡한 표현을 쓰는 반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또렷한 No 였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 사람들은 좀체로 No 라고 직접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 나왔던 베스트셀러중의 하나가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인" 이라는 책이겠습니까?). 

조금 구차한 변명을 하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너를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고 내가 웹페이지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너의 사진을 올림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inspiration (영감, 동기부여) 가 될 수 있다고 완곡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거듭 No 라는 그의 손사래를 봐야만 했습니다.  일순간 굉장히 미안해지더군요.  그는 이어서 작년 10월만 되어도 사진 촬영에 응했었겠지만 (작년 10월에 노벨상 수상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다, 미안하다라고 얘기를 하더군요. 일견 얼마나 많은 사진 세례에 시달렸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에 과감히 그와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더 이상 괴롭히는 것도 예의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그 순간 제가 한국 사람을 대표하고 있는데 매너있게 행동하는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옆에 있던 시마즈 회사 동료들도 미안하지만 사진은 안된다 라고 거들어 주어서 제가 바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게 미안했던지 다나까 고이찌는 윗주머니에서 자기의 명함을 꺼내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성의를 표시하는 다나까 고이찌가 그 순간 고맙더군요. 무례해서 그렇게 사진요청을 거절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실갱이 아닌 실갱이가 오간 후에는 편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좀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된 당신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고 했더니 그가 그건 NHK 에서 제작된 걸거다해서 제가 맞다고 맞장구를 쳤고 한국의 학생들이 많이 동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니 꼭 한번 한국을 방문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주십사하고 부탁도 했습니다.  바로 직전에 제가 물어본 한국에 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가 없다고 했었거든요.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이미 약간의 지식을 가진 듯 해서 자기 회사 시마즈 제작소의 한국 지사가 '동일'이라는 것을 저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와 저와의 대화는 계속해서 영어로 진행이 되었고 그의 영어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5년 이상을 시마즈 연구소에서 지냈었던 경력 탓에 의사 소통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던지는 그의 인상은 다큐멘터리에서 강조되었다시피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엔지니어였습니다. 그의 옷차림, 머리 및 모든 스타일 역시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엔지니어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날 오후에 있었던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는 깔끔하게 단정한 머리와 신사복을 입고 나와 다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가 입었던 신사복이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아 (나중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시 확인을 했음^^) 저의 미소를 자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잠시 그의 노벨상 수상자 초청 강연 얘기를 하자면 제가 참석한 학회가 규모가 커서 그의 강연장에는 3-4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한 듯 했습니다. 그렇게 큰 강연장을 처음 보았고 (대형 스크린이 가로로 8개나 설치될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 안에서 펼쳐진 그의 강연은 주로 그 역시 노벨상을 받아서 무척 당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의 동료들의 공로 치하 그리고 그가 한 일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바로 전년도 노벨상 수상자인데다가 학위없이 노벨상을 받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지라 그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었습니다.



nobel_prize노벨상 수상 직후 그의 아내와



저는 첫만남에서 서서 그와 불과 10분 혹은 15분 정도 얘기를 나누었을까요, 이렇게 짧은 시간의 대화 후에 정중히 인사를 하고 제가 자리를 뜨는 것으로 그와의 첫만남은 마감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왠지 그를 오래 괴롭히기는 싫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는 43살에 노벨상을 받았고 그가 노벨상을 받은 업적은 그가 27살에 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실험중에 우연히 오염된 용매가 아까와 오염된 용매를 이용하여 실험을 하는 바람에 그 결과로서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고 그 발견이 단백질 분석의 중요 역할을 하는 기기의 원리가 되는 바람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노벨상을 받기 전에는 일본 국내 학회에서 우수 논문상을 단 한차례 수상한 것이 그의 수상 경력의 전부다이다고 할만큼 평범한 연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노벨상 수상이 전세계에 더욱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고 하는 것을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습니다. 

그가 선물한 명함과 그의 회사 동료의 명함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재 시마즈 제작소 측에서 '다나까 고이찌 기념 질량분석 연구소" 를 만들어 주어 총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함에는 단순히 "질량분석 연구소 소장" 이라고만 씌여있습니다. 물론 그 연구소에 근무하는 동료들의 명함에는 모두 '다나까 고이찌 기념 질량분석 연구소" 라고 쓰여 있었으며 명함 뒷면의 영문 표기 역시 다나까 고이찌의 것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명함에만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 이름이 일어로도 영어로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다나까 고이찌의 일면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 다나까 고이치의 명함>



< 회사 동료의 명함. 연구소 이름 앞에 '다나까고이치 기념'이 붙어있음>


그 후 학회기간 내내 이곳 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다나까 고이찌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학회장 한가운데 마련된 휴식용 테이블에 우연히 다시 나란히 앉게 되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이때는 다나까 고이찌가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어서 끼어들지는 못하고 인사만 나누었습니다.  이때도 느낌이 참 평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벨상 수상자들은 제가 본 TV 나 사진에서의 혹은 이번에 온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자인 죤 펜 교수처럼 나이가 많았고 모두 항상 신사복을 입고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다나까 고이찌는 일본에서 학위 없이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고 역대 노벨상 수상자중에 두번째로 젊다는 군요). 

우습지만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노벨상 수상을 꿈꾸어 왔던 저에게 한자리에서 두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직접 볼 수 있었던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학회는 저의 기억속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TV 에서나 볼 수 있었던 평민(?) 노벨상 수상자 다나까 고이찌와의 짧은 만남 역시 저에게 동기 부여가 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니까요.

아무쪼록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학벌이나 기타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하는 사람이 꼭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제가 외국에 나와서 지켜보니 한국인 연구자들의 노력이나 역량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는 것을 절감하고 있기에 빠른 시일내에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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