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국에 살고 있으며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한번 한국에 나가려면 비행기 값만으로도 여간 큰 돈이 들기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는 일은 4-5년에 한번이 고작입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해야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수기에 비행기표를 구입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비행기표 가격만 약 6백만원에 3-4주간의 용돈들을 포함하면 사실 4-5년만의 방문 조차도 여의치는 않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한국을 가야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한번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연로하신 두분의 부모님과 두분의 장인/장모님이 생존해 있는 장남이자 사위로서 새벽쯤에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나 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저희 집의 전화하나를 한국의 070 전화를 받는 전용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는 전화는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큰 애가 대학에 가고 나서는 일체의 가족여행을 가거나 휴가를 쓰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12월 연말에는 일년간 쓰지 않은 휴가가 쌓이게 되어 안 쓴다고 돈으로 계산해 주는 것도 아닌지라 언제나 12월 연말에는 거의 한달을 놀게 됩니다.  절친한 직장 동료들도 이런 저를 잘 알기에 아예 여름쯤이면 흔히 하는 대화인 올해 휴가 어디로 갈래 대신에 '넌 올해도 12월 한달을 놀겠구나' 라고 아예 대놓고 얘기하곤 합니다. ^^

 

그런 휴가를 앞둔 작년 12월초 아주 늦은 저녁시간에 말씀드린 그 전화기가 울립니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에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그것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직계 가족도 아닌 고모님께서 'XX 야, 니가 지금 한국에 나와봐야겠다' 라고 딱 한문장 하시고 다시 울음을 터트리시는 것을 들으니 왠만한 스릴러 영화는 저리 가라 할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흐릅니다.

 

경직된 나의 표정을 본 아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저 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가야될 것 같아"

 

다행히도 부모님에게 큰 일이 당장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급히 나가 봐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생략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도 마일리지 티켓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몇십년간 단 한번도 쓰지 않은 마일리지가 조금 있었거든요 (몇십년이라도 실 방문수는 별로 안됩니다).  다행히 한장의 마일리지 티켓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제가 끝내고 가야할 일이 있어서 3-4일 후 휴가가 시작되는 날로 맞추어서 마일리지를 끊었습니다. 이코노미에는 마일리지 자리가 없어서 평생 타본 적이 없는 비지니스를 끊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비지니스를 처음 타고 싶지는 않았는데라는 불경한 생각이 그 순간에도 잠시 스쳐갑니다.

 

어차피 직장에 가서 얘기를 해도 휴가가 시작하는 날짜에 귀국을 결정했으니 업무에는 차질이 없습니다만 한분도 아니고 2-3명의 상사들이 왜 당장 떠나지 않느냐고 이해를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급하게 왔습니다.  보통 한국에 나올 때면 2-3달 전부터 차곡차곡 계획을 짜고 만날 분들을 정리하고 그 분들께 일일이 전화해서 편한 시간을 잡아서 스케쥴을 꼼꼼히 짜고 옵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가가 전주인데 한국에 있는 동안 70% 정도는 서울에서 거주하고 30% 정도만 전주의 부모님 댁에 머무는데 그 이유는 제가 만나야 하는 분, 지인들, 친구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고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에 고향에 오래 대부분 머물 작정을 하고 왔습니다.  2주 반 정도의 일정을 잡았는데 사실상 3주가 넘는 휴가가 있었음에도 그래도 내 가족 내 자식들에게도 연말의 작은 시간을 할애해 주고 싶은 이기적인 생각에서였습니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라 그러나 봅니다.

 

언제나 한국에 도착하게 되면 일단 서울의 처가댁에 들렸다가 숨 좀 돌리고 내려가는게 한번도 변하지 않은 저의 귀국 일정인데 바로 인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합니다.  참 편리하게 되어 있더군요.  공항에서 전국 주요도시로 아주 쾌적한 버스편으로 바로 갈 수 있으니..  4년만에 보는 창밖의 풍경은 변한게 별로 없었을 터인데도 이상하게도 이국적입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서인가요?  직장생활하면서 예전에 고생했던 경기도 화성 근처를 지나는데 상전벽해라고 할만큼 많이 변했더군요.  화성, 발안, 향남 이런데는 참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미친듯이 챙겨서 혼자서 홀홀단신 귀국했던 것과는 달리 상황은 많이 호전되어서 부모님 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오전에서 오후 6시까지는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현직에 종사하고 계셔서 가업의 현장에 나가서 같이 앉아있는게 고작이었지만 말입니다.  아침 일찍 아버지가 나가서 문을 열고 어머니랑 제가 오전 9시 넘어서 나가서 교대하면 아버지가 볼 일을 보시고 다시 오후에 돌아오시면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돌아오고 제가 집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드시고)  나중에 아버지가 문을 닫고 들어오시는 그런 패턴입니다.

 

그런데 저의 한국 방문을 알게 된 초등학교 친구들의 성화가 장난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곳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네이버 밴드를 통하여 다시 만났고 한국에 갈 수 없는 저를 위하여 친구들이 저희 부모님이 일하시는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사진을 찍어서 저에게 보내준 나름 저에게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혹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 동창들 때문에 눈물 좀 흘렸습니다 라는 글이었습니다)

 

37년이상 심지어는 40년 동안을 한번도 다시 본 적이 없는 친구가 미쿡(오타 아닙니다. 걔네들이 이렇게 부릅니다 ^^)에서 왔다고 만나자고 성화입니다.  어차피 저녁 7시 이후쯤에는 어머님도 잠자리에 드시니 친구들 좀 만나도 되겠다는 자기 합리화도 좀 했습니다.  그렇게 모임이 만들어지고 저는 근 40여년만에 사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초등학교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가게 됩니다 (그래도 서울에 사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은 여러 계기로 소개한 적이 있지만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은 처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멋진 옷 같은 것은 저에게도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이곳 미국 생활은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서 좋습니다) 급하게 온 한국에 들고 온 옷가지도 변변찮아 아무거나 주워입고 마침 우리 아파트 근처에 살아 가끔 저희 부모님을 챙겨주고 제가 이곳 프차에 올린 학위를 따기 위한 수기 글을 인쇄까지 해서 부모님께 전해주었던 친구를 38년만에 만나 그의 차를 얻어타고 또 다른 동창이 운영하는 족발집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이 친구는 제가 얼굴을 잘 기억하는 친구입니다. ^^

 

그 모임을 좀 일찍 나가서 자리에 앉고 속속들이 친구들이 도착하는 순간 알았습니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내 동창들, 특히 여자동창들은 정말 너무나 멋지게 차려입고 왔더군요.  저를 빼고 총 20명이 참석을 했고 그 중 11명은 여자동창이었습니다.  여자동창 친구들은 다들 정말 젊어 보였고 참 세련된 옷차림이어서 저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입담이 예전부터 걸죽했던 친구가 크게 한마디 합니다 (친구의 말을 그대로 전하느라 아래의 글에 비속어가 들어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년들이 애인 만나러 왔냐????"

 

거친 말투에 깜짝 놀랐지만 바로 옆에 앉은 여자동창이 원래 우리 자주 만나서 이러고 지낸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아마도 그 친구가 보기에도 제가 굉장히 놀라는게 느껴졌나 봅니다. ^^

 

다행히 만나고 보니 그 오랜 격차에도 불구하고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르더군요.  제 세대는 여학생들과 친하게 지낸 세대가 아닌데다가 제가 당시에 임원 같은 것을 해서 여자급우랑 이야기만 나누어도 화장실에 "XX 이는 누구랑 연애한대요" 낙서가 올라오던 시대였고 그로 인해 학교 안다닌다고 울고불고 했던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었던지라 애써 여학생들을 외면하고 살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친구들 얼굴과 기억들이 떠오르더라구요.  무려 40년전에 만났던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죠.

 

당시 저는 부모님이 전문직에 계셔서 비교적 유복하게 사는 편이었는데 이 날 참석한 친구 중의 하나는 우리 집에서 케익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먹어보았다 그래서 그 때 그 친구가 궁금해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에서 왔다라고 해서 저를 놀라게 하였고 조금 늦게 도착한 친구는 평택에서 전주까지 3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버스를 타고 달려와 주어서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집에서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정작 저는 기억이 아주 상세하게 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참 많은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많은 일을 함께 했더군요. ^^  동창친구들이 들려주는 저의어릴 적 모습은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저에게는 낯설게까지 느껴지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들은 끊임이 없었고 이날 모임이 열린 동창 친구가 하는 족발/갈비집의 양념족발은 평생 처음 먹어보는 기막힌 맛이더군요.  나중에 제가 집에 혼자 있게 된 날 어머니도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저녁을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카톡으로 마침 연락이 되어서 저에게 족발을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배달을 하지 않는 식당인데 어찌 보내냐 했더니 한국은 음식도 오토바이 택배로 배달이 되더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도 이 족발 맛이 생각나서 침이 고이고 있습니다. 잘게 썰은 뼈가 붙은 아주 매콤하고 칼칼한 족발은 정말 최곱니다. 쓰읍… )  단언컨대 식문화에 관한한 한국은 세계 최고입니다. ^^

 

"너네들 집에 안가도 되냐?"

 

대부분 가정이 있는 친구 그것도 여자동창들의 경우 모임이 평일 그것도 새벽 3시를 넘어감에도 함께 해주는 것에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더니 다들 얘기하고 나왔으니 걱정말라고 하는데서도 또 한번의 문화컬쳐를 느꼈습니다 ^^  그렇게 새벽 3시 반을 넘어서 첫 만남이 끝났고 저는 정말 아주 아주 오랜만에 제가 모임의 주인공이 된 그런 황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지인들을 만나뵈어도 처음 10분 정도의 안부 이후에는 모인 분들 각자의 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렇게 만나서 헤어질때까지 제 이야기만 하는 모임은 아마 없지 않았나 싶을만큼 친구들은 저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미국에서의 생활 이야기 또 각자의 이야기들로 정말 저만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인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렇게 단 한번의 멋진 만남으로 기억되고 끝날줄 알았더니만 저의 고향 친구들은 참으로 지독하게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더군요.  총 7번의 모임을 했습니다.  '니네들 징하다' 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  

 

저 하나 보자고 나와준 친구들이 궁금해서 일일이 기록해둔 이름들을 세어보니 총 72명의 초등학교 동창이 참석해 주었더군요 (물론 중복 인원 덕분에 숫자가 많아졌습니다만 ^^).  그 중에 서울에서 열린 한번의 모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모임을 개근해 준 친구도 있었고 새벽 3시에 공항가는 버스를 타야하는 마지막 날 밤 7시에 저를 불러내어 마지막으로 못 먹어본 것 다 사주겠다고 하여 그동안 전주에서 놓치고 갈뻔했던 소머리 국밥과 양념통닭을 사주면서 저를 10시까지 붙잡았던 4명의 여자동창 친구들은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50이 되었음에도 변변하게 돈을 벌지 못하는 아들에게 너를 보러오는 친구들 대접은 니가 다해라고 쾌히 아버지가 신용카드를 쾌척해 주셨음에도 제 친구들은 티안나게 몰래 몰래 계산을 했더라구요. 어쩐지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갈비와 족발과 술을 양껏 먹었음에도 20만원쯤 나와서 한국이 생각보다 참 싸구나 생각했던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었습니다. ^^

 

그런데 정작 저를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야기는 이제야 등장합니다. ^^  고향을 떠나기전 마지막 공식 송별모임에서 한 여자동창이 명함식으로 된 USB 메모리를 하나 슬쩍 건네줍니다.  

 

"미국 가면 봐"

 

USB 메모리? 아 사진을 담아 주었나보구나.   이제 80이 되어가는 아버지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그 새벽 3시에 도착한 버스 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로 도착한 공항의 라운지에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USB 메모리를 노트북에 꼽아 봅니다.

 

"안녕 XX 야~~~"

 

메모리 속에는 뜻밖에도 동영상이 담겨 있었고 동영상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 곡만큼은 피아노로 직접 연주해 보고 싶다고 꿈을 꾸었었고 50이 다된 나이에 그 꿈을 이루었다고 한번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던 '문리버 (Moon river)’ 음악이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자식들 센스 하나는 정말… ^^;;

 

그 동영상 속에서 동창 친구들은 하나씩 돌아가면서 저에게 메시지를 남겨주고 있었습니다.  장소를 보아하니 모두 모임이 있던 곳입니다.  한번도 아닌 여러번에 걸쳐 찍은 것들입니다.   아마도 제가 화장실에 갈때나 다른 친구들하고 핸드폰으로 연락이 되서 통화하고 있을 때 찍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USB 메모리를 건네 준 여자동창 친구가 열심히 편집을 해서 음악을 넣고 자막까지 넣어서 동영상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50이 다된 아주머니가 컴퓨터를 들여다 보면서 한땀 한땀 편집했을 장면을 생각하니 울컥합니다 (선아야, 고마워~~),

 

이 세상의 몇명이나 40여년을 못 본 많은 어릴적 친구들의 격려의 말이 담긴 동영상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더더욱 감동이었습니다.  지금도 조금만 힘든 모습으로 축쳐져서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놀리듯이 친구들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얘기합니다.

 

"안녕 XX 야~~~ 나 누구야  깔깔깔"

 

그리고 항상 정색을 하며 얘기를 더합니다.

 

"자기 힘을 내… 자기에게는 이렇게 자기를 응원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

 

분명히 아내에게 놀림을 받는 건데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도 이 친구들의 동영상은 제 핸드폰에서 제가 조금 쳐질 때마다 보는 단골 동영상이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동영상을 넋놓고 보고 있다가 지나가는 자녀들에게 아빠 동창 친구들이 아빠를 초등학교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자랑을 해도 '풋' 하는 표정으로 관심도 없이 지나가버리는게 좀 깨는 일이긴 합니다만..   하긴 발톱이나 뜯고 응접실 소파에서 코를 골고 널부러져 있는 아빠가 저런 아이돌 어쩌고 하니 기가 막힐 것 같긴 합니다만…  이 놈들아 니네 애비가 한때는 엄청 잘 나갔다고!! 흥!!!

 

결국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화들짝 마음을 졸이고 달려온 한국에서 정말 오래 간직할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저에게 언제나 힐링이 되어줄 평생의 선물을 하나 받고 온 저는 참 행운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몇자 적자고 했던 것이 이렇게 길어져 버렸고 짧은 방문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건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던 공부와 직장생활로 언제나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 나름 한 찌질하는 소시민인 저에게도 이런 멋진 일이 생기기도 하네요.

 

마음 같아서는 동영상을 공개해서 자랑도 하고 싶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여자동창 친구들의 소중한 초상권 보호를 위해 그리 하지 못함을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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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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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yan 2016.08.05 1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물이 찔끔 나는게 제 동창 친구들 생각도 나고... 부모님 생각도 나고 그러네요...


이제는 한국을 떠나온지 제법 되어서 한국의 초중고생들이 여름방학을 지금 맞이하고 있는지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미국에서는 5월말에 초중고 및 대학교까지 방학을 하여 무려 석달이나 되는 방학기간을 맞이하고 있으며 대학 도시인 제가 살고 있는 이 곳은 덕분에 엄청 한산합니다. 

 

미국은 보통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4년이 고등학생 기간이며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독특하게도 8학년부터 12학년까지 5년제로 되어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9월에 학기가 시작되면 11학년(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아이는 본격적으로 대학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통 미국에서는 11학년이 끝나기전에 입시를 모두 마치고 한국의 고3이라고 할 수 있는 12학년에는 입시를 준비하기보다는 학교에 직접 응시를 하고 대학을 결정하는 1년간을 거치게 됩니다.

 

한국처럼 입시준비를 위해 가능한 모든 시간을 투자하는 분위기가 아닌지라 딸아이는 긴긴 여름방학동안 뭘할까 하다가 이제 고1에 불과하지만 동네의 한국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알바와 병원에서 의료 자원 봉사를 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식당 서빙이야 정해진 시간에 가서 손님들 주문받고 상 치우고 주방 스텝들 돕는 일들이고 만 16살임에도 운전을 시작한 탓에 혼자 차를 몰고 가서 돈도 벌면서 노동의 고달픔을 몸소 배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끔씩 식당 스텝들과 함께 하루일을 정리한 저녁이면 한국의 설빙 스타일로 만들어 팔고 있는 빙수를 나누어 먹다가 못내 아쉬운지 저희 부부에게 전화를 해서 멀지 않은 식당으로 현찰을 들고 가서 정식으로 다시 주문을 해서 함께 빙수를 나누어 먹는 일은 저희 가족의 새로운 여흥거리가 되었고 이렇게 먹는 빙수는 정말 맛있습니다 (얼음이 아주 자그마한 바늘 스타일로 떨어지는 방식인데 설빙 스타일 이렇게 부르기는 하지만 전 설빙 빙수를 먹어본 적이 없어 직접 비교가 안됩니다.  다만 한국에서 들여온 정말 엄청 고가라는 그 빙수 기계를 집에다 사다 놓고 싶을만큼 맛납니다 ^^).

 

또 다른 일인 의료 자원 봉사는 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 동네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것이고 병원 일이어서 그런지 초반 요구사항이 많았습니다. 특히 딸 아이는 어렸을 때 수두를 앓아서 수두에 관한 접종 증명을 할 필요가 없는데 병원에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다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건강 증명 테스트가 몇개 있어서 무려 저희 돈을 25만원이나 들여서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병원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요구 사항이 있음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자원봉사 하면서 내 돈을 엄청 들여야 하는 상황이 좀 웃음이 나기는 했습니다. ^^

 

하지만 병원 이름이 떡 박힌 목에 걸고 다니는 포토 ID 를 매고 깔끔한 남방과 단정한 바지를 입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딸 아이를 내려다 줄 때면 뭔가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딸을 키워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하이틴으로 불리우는 딸아이가 집 안에서 꼴보기 싫은 순간도 사실 많거든요. ^^

 

그러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이제 오늘만 버티면 이틀 노는구나 하고 어떻게든 하루를 때워야지 하는 금요일 오전 딸아이로부터 카톡이 옵니다.

 

"아빠 혹시 엄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미국에 살고 있지만 항상 카톡만은 한글로 하는 가족간의 불문률을 잘 지키는 딸아이의 메세지였습니다. 아마도 엄마에게 뭔가 물어볼게 생긴 모양입니다.

 

"모르겠는데?" (속마음이야 '얘야 아빠는 회사에 있는데 그걸 어찌 알겠니?" 였지만 말이죠 ^^)

 

딸 아이의 답변이 바로 이어집니다

 

"음, 알겠어"

"그래도"

 

이후 "Thank You" 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귀여운 춤추는 이모티콘이 아래에 찍혀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래도'는 그냥 오타였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제가 20년을 배운 유창한 영어로 딸아이에게 한마디 합니다.

"You are welcome"

 

그렇게 다시 시간아 어서가라 아몰랑 모드로 얼릉 돌아갑니다.  그런데 1시간도 지나지 않았을까 또 카톡이 또 울립니다.  별로 카톡을 받을 일이 없는 중년의 인기없는 사내에게 카톡은 그리 빈번히 울리는 물건이 아닙니다만 이번에는 아내였습니다.  더구나 딸아이랑 아내가 평일 점심도 되기 전에 카톡이 바리바리 오는 경우 또한 흔치 않긴 합니다.

 

여러줄로 보내진 아내의 카톡은 딸아이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와 있다는 겁니다. 잠시 머리가 멍했습니다.  병원 안에 있는 아이가 응급실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도저히 카톡만으로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 전화로 연결을 하였고 나중에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실 병원에서 평범한 고등학교 여학생의 자원봉사란게 대개는 환자 떠난 침대를 정리하거나 서류 복사 혹은 청소 등으로 매우 허드렛일이며 이런 점 때문에 이름은 근사하지만 막상 하고난 학생들이 불평이 많다는 얘기를 딸아이에게 진작에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부서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어 소화내과를 선택해서 간 딸아이는 마침 지금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선배님이신 의사를 만나서 매우 기본적인 일 이외에도 진료를 하거나 처치를 하는 병실에 함께 들어가서 친절하신 선배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가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뜻밖의 호사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는 위내시경을 하는 환자방에 함께 들어갔는데 일반적인 주기적인 건강진단으로서의 위내시경이 아닌 듯 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는 내가 한번 점검해 보고 싶다고 위 내시경을 할 수 없습니다. 의료 보험 회사에서 먼저 사전허락(pre-approval) 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돈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하면 할수는 있는데 이때 비용은 우리 동네의 경우 350만원 정도 합니다. 35만원 아닙니다. 아내가 한번 한 적이 있을 때 물어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환자 관련 내용이야 딸아이나 저도 모르지만 마취가 잘 먹지 않는 상황에서 내시경을 꽂아 놓은 구강에서 계속해서 피가 솟구치는 조금은 아찔한 상황이었나 봅니다.  딸아이의 얘기를 빌자면 속이 메슥거리면서 몸이 떨려오더랍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실 밖으로 나와 잠시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순간 깜박 조는 느낌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있더랍니다.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이 인지가 되고 사람들은 모여 있는게 아니고 자기를 내려보고 있더랍니다.  즉시 응급실(ER)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살짝 정신이 든 딸아이가 저에게 카톡을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아빠는 일해야 하니까 생각이 들어서 엄마를 찾았던 모양입니다.

 

응급실로 옮겨진 딸아이는 즉시 채혈검사 및 엑스레이와 심전도(EKG) 검사까지 행해진 모양입니다.  마침 저희 집 근처의 산책코스로 핸드폰도 놓고 걷기 운동을 나갔던 아내는 뒤늦게야 전화 연락을 받고 부랴 부랴 응급실로 와보니 딸아이는 손가락에 심장박동수를 점검하는 센서를 꼽고 기절하며 쓰러질 때의 충격으로 빨갛게 부어 올라 멍이 든 이마를 한채로 누워있더랍니다.

 

예전에 토네이도를 쫓아 다녔던 Storm Chaser 였다는 간호보조원 할머니는 행여라도 미래에 의사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어린 소녀에게 의사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다정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고 간간이 들리던 응급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의대 해부학 시간에도 이런 일은 흔하고 몸이 떨렸던 것은 발작(seizure)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떨림(shaking)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 일이 계속 자원봉사를 하거나 나중에라도 의사가 되는 것에 전혀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안심을 시키고 가더랍니다. 그 밖에도 간호사 분들이 참 따뜻하게 이야기를 해주더랩니다 (그러나 미국생활 20년차인 저희는 이 친절함이 나중에 어마어마한 청구서로 돌아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

 

다행히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으로 나왔고 지금은 집에 와서 편안히 누워서 멍이 든 얼굴 부위를 얼음 주머니로 문지르고 있는 중입니다.  아내의 말로는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병원비가 많이 나올테니 자기가 반을 내겠다고 얘기하는 딸 아이가 무척이나 안스러웠다고 얘기하더군요.

 

가끔은 사춘기 특유의 반항기로 얄밉기도 했던 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저도 참 안스럽고 우습게도 그 어느때보다도 사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몸이 닿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딸인지라 따뜻하게 안아주지는 못했지만 나름 최근에 모아놓은 모든 사랑을 주섬주섬 모아모아 아주 아주 따뜻하게 얘기를 건네주었습니다.

 

사실 딸아이는 의사를 꿈꾸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늘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아니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집에 물난리가 난 이후 길게 쏟아지는 비가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도 비가 많이 오거나 천둥이 치면 안절부절 못하는 딸아이인지라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 이번주만이라도 평소의 툴툴대는 아빠가 아닌 딸아이를 세심하게 보듬어 주는 아빠가 한번 되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바램은 다시 병원 출입증을 당당하게 목에 걸고 병원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기는 하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  아내 이야기로는 같이 일하던 사람들 앞에서 쓰러졌던 자기 모습이 쑥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축구장과 농구코트를 누비면서 선수생활을 했던 딸 아이는 잘 이겨내리라고 믿습니다.

 

적지 않게 놀란 하루이지만 이렇게 돌이켜 보면서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갈 수 있는 지금이 사실 무척 감사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말 끊임 없는 놀라움의 연속임에 틀림 없습니다. ^^

 

P. S. : 지금 다시 보게 된 딸아이의 카톡 메세지는 아무래도 오타가 아닌 "그래도 (아빠 혹시 여기로 좀 와줄 수 있겠어?)" 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왜 엄마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라고 묻지 않았던 비정한 아빠인 듯 하여 참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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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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